소통, 상소(上疏) 그리고 SNS

상상발전소/칼럼 인터뷰 2012. 9. 17. 17:17 Posted by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소통, 상소(上疏) 그리고 SNS

 

지상파DMB 한국DMB㈜ QBS
이희대 편성제작팀장

 

 

지난 8월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국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394만 2000원으로 집계되었고, 그 중 통신비는 15만 4400원으로 그 비중이 월 소득의 약 6.5%에 이른다고 밝혔다. 식료품비가 32만 6000원으로 약 13.7%, 의류구입비가 17만원으로 7.1%, 인 것을 고려하면 상당한 비중이라 볼 수 있다(통계청, 2012). 당장 배를 채우고, 옷을 입는 일이 아님에도 누군가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식비와 의류비의 1/2 또는 거의 같은 수준을 할애하는 모양새다. 이는 일본의 1.4배, 미국보다는 1.8배로 거의 두 배 가까이라고 한다(문성희, 2012).


이 같은 결과를 우리나라의 통신사 경쟁구도와 연계한 특수 상황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소통에 돈을 아끼지 않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친(親)소통의 기질을 보여주는 한 예가 아닐까 한다. 초고속 인터넷 보급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보급률 등이 세계 최고를 기록하는 것도 역시 이러한 소통의 기질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지난해 11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과 SNS 심의를 전담하는 '뉴미디어 정보 심의 팀'을 신설했다. 개인적 사유의 문자 커뮤니케이션 공간이자 빠른 전파력을 가진 매체의 성격을 함께 갖고 있는 이 신종 미디어에 심의의 잣대가 들어서게 되면서 지금까지도 이에 대해 찬반이 분분하다.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반대 여론과 수위를 넘어서는 정치편향적 내용에는 규제가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과거 신문이, 방송이, 인터넷이 그랬던 것처럼 시대의 변화와 함께 새로이 등장한 이 정의하기 어려운 커뮤니케이션 채널은 다시 우리나라만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에 따라 그리고 기꺼이 이 소통에 관심을 쏟고 할애할 준비가 된 우리나라 사람들을 만나 다분히 ‘한국스러운’ 용도로 변모했고 또 변모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소통 지향적 기질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소통 채널’의 운영에 대해 보다 오래된 과거의 역사 속 모습은 어떠했을까? 특히 500년간을 한 왕조를 이어온 조선은 어떤 소통의 비책을 가지고 있었을까?


조선의 건국 시스템인 왕도(王道)정치는 왕권의 견제와 보필의 목적으로 공론정치(公論政治), 광개언로(廣開言路)를 기반으로 언론의 제도화를 갖춘바 있다. 이는 크게 언론 3사 즉,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을 통한 왕의 간쟁(諫諍) 제도와 아랫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언로제도로서는 관료 등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상소(上疏)를, 일반 백성들에게는 신문고와 격쟁 등의 제도를 두었다.


상식적으로는 왕정시스템에서 최고 집권자인 왕에게 직접 발언을 할 수 있는 구조가 당시 활성화 되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조선의 장기 왕조의 비밀은 바로 이러한 다양한 언로(言路)제도를 통한 왕권과 신권의 견제와 균형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나라가 난국에 처했을 때 임금이 직접 의견을 구하는 여론 수렴 제도도 구비되어 있었는데 이를 구언(求言)이라 한다. 왕이 직접 대소관원을 상대로 의견을 수집(백관진언; 白官陳言) 또는 재야사림의 의견을 청취(유현수의; 儒賢收議)했고, 심지어는 궐문 앞에서 일반상민들을 대상으로 직접 의견 수집하는 순문(詢問)과 백성들과 교우하는 궐밖 행차였던 행행(遊幸)까지 넓은 의미에서 구언의 범주에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왕에게 의견을 전달하는 언로제도는 커뮤니케이션 수단별로 아래 표와 같이 다양한 형태로 시행된바 있다(오인환, 이규완 2003).

 


<표1> 조선시대 언로(言路)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에 따른 분류

 

 

 

이같이 다양한 언로의 형태 중 조선시대를 전반에 거쳐 가장 활성화된 것은 바로 상소(上疏)라 할 수 있다.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는 조선왕조실록 총 36만 2,161 기사 중 '상소'와 관련된 기사가 9.7%에 달해 거의 실록의 1/10 이 상소 관련 기록이라는 것은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이규완, 2004).


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가 이 상소에 관심을 두는 것은 이 오래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역사적으로도 매우 옛 되고 형태적으로는 극명하게 단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통의 특성과 활용도 그리고 그 의미가 오늘날에도 같은 눈높이에서 평가되고 비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상소는 원칙적으로는 누구나 참여 가능한 전제지만 관료, 학계 등 주요 지식인들의 비판적 정치 참여 채널 성격으로 볼 수 있다. 상소(上疏)는 ‘위’에 의견을 올려 소통하다(疏)라는 뜻이다. 이처럼 조선의 정치 시스템은 국정 최고 지도자인 왕에게도 소통이 가능한 여러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상소는 사실상 '문서'라는 도구를 이용해 왕을 상대로 자신의 의견을 간(諫)하여 올리는 행위다. 

 

언로가 막히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 유교정치의 이상이기 때문에 조선은 상소의 내용이 강경해도 처벌하지 않거나 관대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원칙이 무시되고 상소 내용이 문제되어 처벌받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국왕이나 대신들을 심하게 공격하는 상소는 때에 따라 귀양을 가거나 목숨까지 잃게 마련이었다. 이에 상소작성은 도입, 전개, 종결과 같이 일종의 정형화를 거쳐서 어떤 신하들도 일정 이상의 격을 갖춤으로써 아랫사람으로서의 연대적 보호장치를 마련하고, 천재지변을 거론하고, 고사를 인용하면서 객관성과 보편성을 확보하는 형태를 띤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이다. 이른바 광개언로(廣開言路)와 수상비죄가 그것이다. (오인환, 이규완 2003). 


『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한(漢)나라 광무(光武) 때에 여러 신하가 상소한 것을 〈신하들에게 내리지 말고〉 안에 머물러 두기를 청하니, 광무(光武)가 말하기를, ‘무릇 나라의 일은 마땅히 여러 신하와 같이 의논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안에 머물러 두라고 하는가.’ 하였으므로, 뒷 사람이 칭찬하였다. 이번에 말을 구[求言]하는 교지(敎旨)에 이르기를, ‘밀봉(密封)하여 아뢰게 하라.’ 한 것은, 유사(有司)에게 맡기지 아니하고 친히 보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승지(承旨)들을 시켜서 그 실행할 수 있는 조건(條件)을 의논하게 하면, 이는 실신(失信)이어서 나의 본심(本心)이 아니다. (중략)” 하니, 조서강(趙瑞康)이 아뢰기를, “(중략) 신 등이 교지를 초(草)할 때에 자세히 살피지 못한 실수이옵니다.” 하였다. 』

 

- 세종실록 1443년 7월 22일(세종 25년) : 임금이 말을 구하는 교지에서 밀봉하여 아뢰라고 한 것을 승정원에서 자세히 살피지 못하다 -


『 정언 홍치영(洪致榮)이 상소하여 금령(禁令)을 거두고 언로(言路)를 열 것을 청하니, 비답하기를, “요즈음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대의 말이 참으로 적중하였다. 말을 하도록 인도하고는 말을 하면 거절하며, 피혐(避嫌)하도록 하고는 와서 피혐하면 책망을 하니, 외면에서 언뜻 보면 정말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녕 어쩔 수 없어서이다.” 하였다 』


- 정조실록 1797년 5월 6일(세종 21년) : 정언 홍치영이 상소하여 금령을 거두고 언로를 열 것을 청하다 –

 

앞서 ‘상소’의 사용자측인 신하들의 시각을 보았다면 위의 두 기사는 조선 왕조의 전성기를 일궈냈던 세종대왕과 정조, 즉 관리자 측이 ‘상소’와 관련하여 보인 태도 중 일부분을 실록에서 옮겨 온 것이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상소문을 먼저 도승지가 받아서 추려내 올리던 관행을 없애고, 왕에게 직접 언론이 전달되게 하라는 세종의 지시내용이며, 후자는 일부 안건에 대해서는 상소 등으로 언급자체를 말라는 정조의 ‘금령’ 지시에 반대해 대각(臺閣)의 업무정상화를 요구하는 신하들의 상소에 사헌부, 사간원의 무용론을 전제하여 다소 냉소적으로 이를 거절하는 왕(정조)의 모습을 담고 있다.


조선왕조 실록 중 세종은 892건, 정조는 2,730건이 ‘상소’ 관련 기사로 검색되고 있어 위에 제시된 예는 정말 일각에 불과한 내용이다. 그러나 위 두 가지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분명 같은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놓고도 그 활용의 수준과 범위는 당시 주사용자 측과 관리자 측의 상황에 따라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세종은 왕에게 직접 언로의 범위를 넓히는 반면, 정조는 사실상 언로를 제한하고 규제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강력한 왕권과 탕평에 반대하는 신하들의 입을 막기 위해 정조는 조선 정치의 기본 시스템인 공론정치와 언로제도를 형해화한 셈이다. 정조 직후 공론정치가 무너진 순조 이후 조선조는 견제와 균형의 틀을 잃은 채 왕조 말기의 전형적 모습을 그리며 스러져 간다.


다시 조선시대 문자 커뮤니케이션이자 소통의 채널 상소에서 현시대로 SNS로 돌아와 본다.


작년 10월 치뤄졌던 서울 시장 보궐선거는 일명 트위터 선거라는 말이 있었다. 결국 당시 박원순 후보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재미있는 결과가 있었다. 인력과 자본력에서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던 나경원 후보와 박시장의 Follow수는 유사한 수준이었고 오히려 tweet의 수는 나 후보 쪽이 양적으로는 더 많았다고 한다. 정리하자면 박 후보는 글의 수가 적었음에도 리트윗이 더 많이 되었다는 얘기다(양대근, 2011). 이에 대해 평가는 공감과 파워트위터러들의 참여 여부로 측정되고 있다. 즉, Follow수는 유사했지만 소속당원 등이 주를 이룬 목적 위주의 연계보다는 글 내용의 진정성 그리고 안철수, 김여진, 김미화 등 파워트위터러들의 지원이 의미를 가졌다는 것이다.

 


21C 대한민국에도 정말 다양한 형태의 상주문들이 현존하고 있다. 다만 조선과 다른 것은 이 상주문들이 왕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함께 열려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주문 역시 공들여 격을 갖추고 진심으로 작성해야 하며 왕을 섬기는 마음으로 이를 받아볼 사람을 겁내 할 줄 알아야 공감을 끌어내고 눈높이를 함께 할 수 있다.


오늘날, 조선 시대 상소의 ‘광개언로’와 ‘수상비죄’의 기치가 인터넷과 SNS라는 쌍방향의 미디어와 결합하면서 그 방향이 왕만이 아니라 국민을 향해 함께 열려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면, 그리고 2500년의 역사를 함께한 상소와 현대의 SNS 모두 결국 진심과 격을 함께 갖출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는 것을 공감한다면 '규제'와 '자율' 중 어느 방향이 더 의로운 것 일지를 생각하게 한다.

 

 

 

   [참고 문헌]

  [통계청] 보도자료. 2012.08.17 2012년 2/4분기 가계동향
  [중앙일보] 박혜민. 2011.06.22 한국 SNS 보급률 세계 최고
  [조세일보] 문성희. 2012.08.08 비싼 요금 받아 번 돈 외국인에 '퍼주기'
  [중앙일보] 심재우. 2011.10.20 방통심의위 “앱•SNS도 심의”
  [주간경향] 정용인. 12.10. 사면초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SNS심의팀 강행 이유는?
  [헤럴드경제] 양대근. 2011.10.26 SNS, 박원순-나경원 승부 갈랐다
  이규완. 2004 상소에 인용된 고사의 설득 용도에 관한 연구
  오인환, 이규완. 2003. 상소의 설득구조에 관한 연구
  신두환. 2009.09. 상소로 보는 역사 이야기
  이호선. 2010. 상소문에 비친 조선의 자화상
  박현모. 2011. 정조 사후 63년 (세도정치기(1800~63)의 국내외 정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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