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은 컷을 이용하여 정치,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을 하는 만화들이 있죠. 시사적 문제나 인물 등에 대한 풍자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러한 만화들을 바로 ‘시사만화’라 하는데요. 시사적 문제를 풍자한 만화이지만 신문의 사회면에 기재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개의 컷(보통 4컷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네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사적 문제를 해학과 풍자로 날카롭게 비평하는 묘미가 있죠. 시사만화는 주로 신문의 삽화로 등장하여 1컷, 또는 2~3컷의 적은 분량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간단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인데요. 그렇기 때문에 만평가는 동시대의 사회를 정확히 진단하여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녀야 하며 또한 그것을 나타냄에 있어 어느 한쪽의 편협한 생각으로 치우치지 않고 정확하게 표현해야할 의무가 있죠. 이러한 ‘시사만화’의 시작은 언제였으며, 어떻게 발전해 왔을까요? 본 기사를 통해 한국의 ‘시사만화’가 걸어온 길에 대해 한번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최초의 시사만화는 대한제국의 종말 상황이 급박해지던 1909년에 등장했습니다. 서울의 항일사회단체 대한협회(대한자강회의 후신)는 <대한민보>를 창간하면서 시사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하였는데요. 친일파에 대한 고발과 규탄, 항일 구국정신의 고취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합니다. 최초의 시사만화는 전통적 수묵화가에 의해 그려졌는데요. 바로 전통적 수묵화가에서 만화가로 등장, 특출한 필력을 발휘한 ‘이도영’입니다. 그는 먹붓을 이용하여 시사적인 주제 대상을 만화로 그렸습니다. 이도영은 신문이 폐간될 때까지 1년 동안 시사만화를 연재 하였는데요. 순종 황제의 비극적인 한일합병 후, ‘대한민보’는 폐간하게 되었고 최초의 시사만화 역시 ‘대한민보’의 폐간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 이도영 화백의 작품

 

이도영 화백은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안중식과 조석진을 스승으로 모시고 미술을 배웠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화법으로 산수와 인물, 화조 등을 즐겨 그렸다고 합니다. 1908년 최초의 미술 교과서인 '도화임본'에 그림을 그렸고, 1909년 민족 신문 '대한민보'에 최초의 시사만화를 발표하였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끝난 후, 대한민국은 가슴 아픈 분단을 겪었습니다. 또한 남한에 민주주의가 자리 잡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죠. 사회에 대한 ‘풍자’를 기본 바탕으로 하고 있는 ‘시사만화’는 그 어떤 장르의 만화보다도 많은 검열과 탄압을 받았습니다. 1950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사만화’는 다양한 스타 캐릭터를 통해 서민의 애환을 대변하며 오랫동안 사랑받았는데요. ‘고바우 영감’부터 ‘왈순 아지매’, ‘까투리 여사’, ‘야로씨’. ‘나대로 선생’ 등의 스타 캐릭터를 통해 인기리에 연재되었습니다.

 

 ▲ (왼쪽부터 시계방향) 고바우영감(김성환) , 까투리여사(윤영옥) , 나대로 선생(이홍우) , 왈순아지매(정운경)

 

  다양한 작품들이 ‘시사만화’답게 다양한 풍자를 통해 당시 사회를 과감하게 비판하곤 했는데요. 대표적인 사건으로 손꼽히는 사건 1958년 김성환 화백의 ‘경무대 똥통’, 1972년 윤영옥 화백의 ‘새마을 운동 비판’, 1986년 안의섭 화백의 ‘대통령 모욕’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고바우 경무대 똥통 만화 사건

ⓒ 김성환


한 해 전, '가짜 이강석 사건'이 세상을 뒤흔들었을 정도로 경무대의 위세가 대단했는데, 김성환 화백은 고바우 영감을 통해 이러한 사태에 대해 풍자를 하였습니다. 1958년 1월 23일 <동아일보>에 실린 이 4컷 짜리 만화로 인해 김성환 만화가는 즉결심판에 넘어가 벌금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위와 같은 작품들은 과감히 사회를 풍자 하였지만, 일부 만화들은 군사 정권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는데요. 박재동 화백의 등장은 참신하고 진보적인 한 칸 만평을 선보이며 ‘시사만화’의 새로운 지각 변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단 한 컷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요. 이는 신문 시사만화의 주류가 ‘네 칸 만화’에서 ‘한 칸 만평’으로 이동하는 세대교체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관련 박재동 화백의 만평

ⓒ 박재동


 한 컷의 만평으로 더욱더 날카롭게 사회를 풍자하던 ‘시사만화’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그 역사를 같이 하며 발전해 나갔는데요. 허나, 이러한 ‘시사만화’에 대한 관심은 2000년대 들어서부터 점차 감소하고 있는 추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사만화’에 대한 위기의 원인으로 민주화 이후 만평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정치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듬과 동시에 인터넷을 통한 새로운 만화 체계의 등장, 그리고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은 ‘시사만화’의 위기로 이어졌습니다. 신문사의 ‘시사만화’의 지면은 점점 줄어들었으며, 몇몇의 신문사는 대표적인 화백이 떠남과 동시에 그 맥이 끊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유일하게 중앙일보에서만 박용석 화백이 그 맥을 잇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 만평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평과 함께 ‘시사만화’로써 시대를 풍미하였던 네 칸 만화 역시 만평과 다르지 않은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1999년 조선일보 ‘미스터 삐삐’(안중규), 2002년 중앙일보 ‘왈순 아지매’(정운경), 2004년 한겨레 ‘미주알’(김을호), 2008년 동아일보 ‘나대로 선생’(이홍우)이 차례차례 연재를 중단했고, 이후 후속작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현재 전국 단위 일간지가 한 칸 만평, 네 칸 만화를 모두 게재하는 경우는 없으며, 유일하게 네 칸 만화를 계속 연재해 온 전국 단위 일간지는 서울신문· 경향신문· 매일경제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시사만화’는 특유의 풍자와 해학을 통해 서민들의 심정을 대변해 주었고 함께 민주화를 키워온 또 다른 공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허나, 시대의 변화에 의해 현재 위기를 겪고 있으며, 점점 더 축소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요. 가장 수준 높은 정신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 ‘풍자’와 ‘해학’을 통해 웃음과 카타르시스를 전해주던 ‘시사만화’, 속 시원하게 긁어주던 ‘시사만화’의 재도약의 날을 기다려 봅니다.

 

 

※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