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이 주는 미학, 슬로우 TV

상상발전소/방송 영화 2015.07.10 10:00 Posted by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 표지 기차 여행을 보여주는 ‘Minutt For Minutt’의 한 장면


6박 7일 동안 생방송으로 크루즈 여행을 방송해 주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믿으시겠나요? 노르웨이의 방송 'Minutt For Minutt'에서는 132시간 동안 노르웨이 전역을 다니는 크루즈 여행의 모든 순간을 보여주었는데요. 이렇듯 아주 느린 호흡으로 과정을 지켜보게끔 하는 슬로우 TV. 슬로우 TV가 대체 무엇인지, 그 방송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한 번 들여다보도록 할까요?



▲ 영상 1 Minutt For Minutt의 Flåmsbana 기차 여행 편


슬로우(slow) TV란 말 그대로 '느린 TV'입니다. 양털로 스웨터를 만들기까지의 여덟 시간 반, 벽난로가 불타는 모습의 12시간 등 아주 느린 과정들이 생방송을 통해 전송 되는데요. 언뜻 '그게 뭐야?' 싶어 보이는 이 프로그램은 노르웨이에서 시청률 30~40%에 달하는 막강한 점유율을 가지고 있습니다. 광고도 없이 달리는 6박 7일간의 크루즈 여행 생방송은 노르웨이 국민 500만 명 중 350만 명이 그 일부를 시청할 정도였다고 하니, 위력이 정말 대단한데요.


팝아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앤디 워홀의 영화 <sleep>, <Eat> 등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sleep>은 1963년에 만들어진 앤디 워홀의 첫 영화로, 시인인 존 조르노가 잠자는 모습을 장장 5시간 동안 보여줍니다. <Eat>에서는 누군가 계속해서 먹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고, <Empire>에서는 엠파이어 빌딩의 8시간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반복되는 일상의 한 장면을 그대로 담은 그의 영화는 극도의 지루함과 예술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는데요. 슬로우 TV는 워홀의 60년대 영화가 가진 양식을 텔레비전 속으로 가져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째서 이 지루한 방송을 시청하고, 열광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무엇이든지 빨리, 그리고 효율적으로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매체 또한 빠르게 흘러가는 것에 길들었기에, 우리가 바라보며 살아가는 세상도 더 빨리빨리 돌아가야 할 것 같죠. 그렇게 우리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재촉합니다. 다음 장면이 빨리 나오기를, 쓸데없는 장면은 빠져 버리기를, 우리의 삶에서도 다음 장면이 더 빨리 만들어지기를.


▲ 사진 1 기찻길을 달리는 ‘Minutt For Minutt’의 한 장면


하지만 슬로우 TV는 그런 재촉 없이 우리가 보고 있던 세상 그대로를 제시합니다. 우리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실제로 내다보는 기찻길과 화면 속에서 흘러가는 기찻길의 모습은 같습니다. 기나긴 영상 안에서는 아주 느긋하게, 그리고 여유롭게 우리와 똑같은 시간이 흘러갑니다. 방송은 어떤 특정 장면을 선택하지 않고, 모든 순간은 선택되거나 버려지지 않습니다. 느린 속도가 주는 기나긴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는 생각의 틈이 주어집니다. 슬로우 TV의 책임 프로듀서 토마스 헬룸은 “계속해서 화면을 보여주면 시청자들은 화면 내에서 각기 다른 것을 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시청자들은 누군가의 해석과 해설 없이 스스로 그 안에서 재미를 찾아내고, 함께 호흡하게 됩니다. 


언뜻 지루해 보이는 이 모든 장면은 모두 우리가 평소에 마주하던 순간입니다. 굉장히 사소한 하나하나의 순간들이지만 그 모든 순간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슬로우 TV는 ‘느림’으로 세상을 보여주면서 우리가 지나쳤던 사소한 순간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합니다. 한 장소에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는 시간, 반복해서 지나가는 나무들을 보는 시간은 편집되어야 했을 장면일까요? 하지만 세상에 편집되어야 할 순간은 없습니다. 모든 사소한 순간을 지나는 느림의 정신은 공동체 정신과도 맞물립니다. 노르웨이 전역의 땅·해안선을 다니는 기차와 여객선, 모든 국민이 참여할 수 있었던 기나긴 합창은 어떠한 시간과 공간도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슬로우 TV의 정신을 보여줍니다.



▲ 사진 2 슬로우 TV의 보트 여행 장면


우리는 끊임없이 미디어를 소비하고 향유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무언가를 기대하게 되는데요. 미디어가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끊임없는 자극입니다. 쉬지 않고 흘러가는 재미있는 장면, 더 자극적인 장면은 우리에게 일탈로 다가옵니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과는 다른 가상의 상황에서 다른 이들이 만들어낸 모습을 보며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곤 하지요. 그런데 슬로우 TV는 그것과는 정반대의 방법을 취합니다. 자극적인 일탈이 아니라,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일상적인 것을 보여주는데요. 오랜 시간, 느린 호흡으로 전개되는 일상의 힘, 그것에서 출발하는 공감의 힘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으로 다가갑니다.


이는 우리의 미디어 현실에 대한 한 가지 충고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방송은 얼마나 정해진 틀 안에 갇혀 있었을까요? SBS 스페셜 신진주 작가는 우리 방송에는 수많은 금기가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방송 현실은 끊임없이 창의성을 요구하지만, 그 안에는 해도 되는 것보다 더 많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존재합니다. 슬로우 TV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왜 이러한 방송의 파격을 시도하지 않을까요? 우리의 미디어 현실에서는 방송이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것,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 먼 노르웨이의 슬로우 TV는 파격적 포맷에도 불구하고 큰 성공을 거두고, 공감을 얻어냅니다. 방송에서 피하려고만 했던 지루함을 일상이란 이름으로 치환하고, 그것에서 시청자가 의미를 찾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빠른 속도 속에서 즉각적인 정보를 선택하는 것에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흘러가는 여러분의 시간에는 1분 1초에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멈춰서, 여러분이 있는 이 세상을 천천히 둘러보세요. 그렇게 슬로우 TV가 추구하는 느림의 미학으로, 조금 더 여유롭고 깊게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요?


ⓒ 사진출처

표지 노르웨이 nrk 홈페이지

영상 1, 사진 1,2 노르웨이 nrk 홈페이지





※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