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난 예술은 철저한 사전준비에서 시작합니다. 글이건 미술이건 남이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도 관찰 할 수 있을 정도로 세밀히 다가가지 않으면 그 작품은 누구나 만들 수 있는 흔한 물건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만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생동감 있는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역동감 있는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누군가의 삶을 엿보는 것 같은 사실감을 그리기 위해 만화가는 보통 사람보다 더욱 세밀하게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허영만 작가는 이 법칙을 충실히 지킨 만화계의 거장입니다. 따라서 작가의 창작과정 부분은 기사에서 따로 떼어내어 독자적인 기사를 만들어보았습니다.



‘허영만 작가는 지독한 메모광이다.’ 바로 ‘창작의 비밀’이라는 이름의 전시실에 들어서면 저도 모르게 입에서 나오던 말입니다. 이 전시실은 허영만 작가가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를 캐릭터, 연출, 스토리 순으로 전시한 장소입니다. 이곳에는 허영만 작가가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효과적인 의미 전달을 위해, 현실감과 근거 있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고 조사를 했는지 알 수 있는 메모와 러프스케치가 즐비합니다. 


첫 번째 홀에서는 작가가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어린 시절 꼭 챙겨보고는 했던 TV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의 원작인 ‘미스터 손’의 초기 콘셉트화가 제일 인상 깊었습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헬멧을 쓰고 날아다니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미스터 손이 아닌 더벅머리에 구름을 타는 그림에서 최초 콘셉트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한편에선 모녀가 미스터 손 캐릭터 기획안 앞에서 오붓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만화가 세대와 세대를 이어주는 매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진1,  ‘미스터 손’ 초기 콘셉트


두 번째 홀에는 작가가 자연스러운 상상의 흐름을 이끌어내기 위해 어떤 기법을 이용하는지 전시해 놓았습니다. 비트에서 쓰였던 빛과 생략을 이용한 기법은 물론이고 타짜에서 쓰인, 영화 스틸 컷을 보는 듯 한 연출도 전부 허영만 작가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결과물이었습니다. 전시장에는 만화와 영화의 ‘밑장빼기’ 씬이 같이 걸려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박힌 이 유명한 장면의 만화 버전과 영화 버전을 비교해보는 재미는 감상에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사물을 이용하는 것도 그의 연출 중 하나입니다. 작가는 ‘비트’에 젊은이들의 로망이었던 한 일본 바이크 회사의 실제 제품을 담아내 ‘가질 수 없는 물건에 대한 갈망’을 자극하여 주인공에 대한 독자들의 동경을 한층 끌어올렸습니다. 


▲사진2 ‘타짜’ 밑장빼기 씬 원작과 영화를 비교하는 관람객


세 번째 홀에서는 스토리를 만들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고 조사했는지 알아볼 수 있습니다. 작가의 초기작 중 하나인 ‘각시탈’은 사실 작가가 데뷔하기도 전에 스토리 완성을 끝낸 상태였다고 합니다. 한 가지 기묘한 사실은 같은 작품의 스토리 기획이라 하더라도 종이가 제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는 작가가 앉아서 스토리를 만든 것이 아니라 평소에 생각나는 사소한 것들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적어내 스토리로 녹여냈다는 뜻입니다. 작품에 대한 작가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홀에서는 ‘오! 한강’을 그리고 기획하던 시절 안기부의 서슬 퍼런 감시가 작가의 낡은 메모지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이념 전쟁 속에서 창작자의 자유를 꿈꾸던 작가의 작가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한편, 창작의 비밀 전시실 말미에는 색다른 작품 몇 점이 걸려있습니다. 바로 팝 아티스트 이동기씨의 오마주 작품입니다. 허영만 작가의 만화를 토대로 만든 그의 작품은 허 작가의 작품을 또 다른 방법으로 해석하는 재미를 던져줍니다.


▲사진3,4 작가의 메모(위), ‘각시탈’ 스토리노트(아래)


거장의 비결에 왕도는 없었습니다. 허영만 작가의 뛰어난 작품성은 작품 하나를 만들 때 마다 행했던 치밀한 자료조사를 바탕으로 나온 결과물이었습니다. 웹툰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를 만들기 위해 10년이라는 세월을 자료 조사하는데 쏟아 부은 사람이 바로 허영만 작가입니다. 혹자는 그런 그를 보고 ‘조사해 놓은 것 중에 얻어 걸리는 것으로 만화를 만든다.’ 라고 비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작자로서 철저한 사전조사는 당연한 미덕이고, 허영만 작가는 이를 잘 실천하는 노력파입니다. 건물 하나를 지을 때에도 기반을 단단히 다집니다. 기반이 단단하지 않으면 건물이 금방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만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미있는 작품은 세밀한 관찰력과 우직한 기획력을 바탕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관찰력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작품은 독자들에게 금방 외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허영만 작가의 창작의 비밀은 끊임없는 취재와 이를 바탕으로 한 메모였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이 정도(正道)이자 왕도였습니다.



ⓒ사진 출처

- 표지 ‘허영만展-창작의 비밀’ 홈페이지

- 사진 1~4 기자 촬영





※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