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귀 기울인 것도, 야자시간에 몰래 웹툰을 보며 웃다 선생님께 걸려 혼이 나는 것도, 퇴근 후 게임 속에서 판타지 세계를 탐험하는 용사가 되는 것도 이야기를 좋아하기에 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인은 행복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기존 올드미디어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디지털 혁명 이후 쏟아지는 뉴미디어의 이야기까지 즐기면서 인류는 이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향유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만든 이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어떨까요? 또한 이야기꾼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그 방법을 몰라서 세상에 자신의 스토리를 내놓을 수 없다면 어떨까요? 당연히 이야기꾼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를 주저할 테고, 그 결과 창작의 샘은 고갈되어 우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해 이야기산업 보호와 활성화를 추구하는 한국 콘텐츠 산업의 전문가들이 모여 포럼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야기산업 중장기계획 수립을 위한 1차 포럼’입니다. 예정된 시간보다 40분을 넘길 정도로 열띤 분위기였던 포럼에서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이야기산업과 이를 지킬 해답은 무엇인지 엿듣기 위해 현장에 직접 다녀와 보았습니다.



▲사진1 ‘창작자의 눈으로 본 이야기산업의 현재와 미래’


이야기 산업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이자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바로 ‘창작’입니다. 창작자가 없다면 이야기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창작자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창작자와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창작자를 지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논의하였습니다. 발제자 이미정 글로벌사이버대 교수의 발의문을 시작으로 진행된 토론에서 토론자들은 저마다의 견해로 창작 진흥을 위한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먼저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창작자를 대하는 현 실정에 문제가 많다는 입장이었습니다. 특히 영화계에서 작가들이 작성하는 ‘표준계약서’의 초안에 이야기의 저작권을 제작사에 영구 귀속시킨다는 조항이 들어있는 것에 강한 반감을 가졌습니다. 


토론자 이인화 이화여대 교수는 이 문제를 두고 전 세계적으로도 영구 귀속사례는 없다며 강한 어조로 비판했습니다. 특히 미국이 시나리오 강국이 된 이유를 ‘작가의 수익을 제작사가 보장해주었기 때문’이라 하며 제작사의 불공정 관행 개선을 촉구했습니다. 토론자는 또, 이러한 불공정 관행들은 큰 수익을 얻은 후 바로 콘텐츠 산업에서 발을 빼려는 영세 제작사들의 불온한 생각 때문에 더욱 횡행하는 것이라 진단했습니다. 따라서 제작사들이 꾸준히 시나리오 작가를 영입하여 콘텐츠 산업에 오래 머무르는 것이 불공정 관행을 해결하는 최우선의 방법이라고 보았습니다.


한편 SBS 편성기획팀의 김일중 토론자님은 이야기산업을 기존 산업과는 다른 눈으로 바라봐야함을 강조했습니다. 이야기산업은 성공을 예측할 수 없는 산업이라는 것이 토론자의 주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작가들을 직접적으로 지원하자는 주장은 이야기산업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 처사이므로 ‘산업 활성화’를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직접 지원은 작가들의 창작 욕구를 오히려 떨어뜨리는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나 시도할 수 있게 실력이 검증 안 된 작가들에게도 기회는 동등하게 주되, 기성작가의 질 좋은 창작욕구도 살릴 수 있는 방향이 맞다 보았습니다. 좋은 작품 또한 산업활성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아이디어 도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야기 거래 플랫폼’에서 업로드, 열람기록을 전부 로그(log)화 하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푸른여름콘텐츠홀딩스의 김태원 토론자님은 이야기산업법이 기존 저작권법과 콘텐츠산업 진흥법과 차별화돼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지금 논의 되고 있는 방향은 너무 ‘작가’만을 생각한다는 것이 토론자의 주장이었습니다. 토론자에 따르면 스토리 창작자는 작가뿐만 아니라 ‘기획 창작자’도 있습니다. 현재 프로듀서의 기획창작을 보호/보장해주는 법 자체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작자의 범위를 넓혀 소외되는 직업 없이 ‘온 국민이 스토리텔러’가 될 수 있게 해주어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진2 ‘이야기산업 활성화를 위한 유통 플랫폼 구축 방안’


만든 이야기가 아무리 훌륭하다 할지라도 들어주는 이가 없으면 그 이야기는 허상이 됩니다. 이야기는 또 다른 종류의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문화관광부의 황소현 발제자님이 발제를 준비했으나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김숙 박사님이 대리 발제 했습니다. 이야기 유통 플랫폼에 대한 정의, 범주 등의 명확한 개념 제시와 플랫폼 구축에 대한 의견제시가 끝나고 각 토론자들은 저마다의 견해를 이야기 했습니다. 

  

이구용 토론자는 창작자가 이야기를 알릴 길이 없고, 출판사는 콘텐츠가 부족한 현실을 알리며 이는 ‘제대로 된 에이전트’의 부재 때문임을 강조했습니다. 토론자에 따르면 한국의 출판 에이전트는 해외 콘텐츠를 사오는 곳일 뿐 국내 작가를 관리, 소개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이 같은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토론자는 국내 시장의 수익구조 때문이라 진단했습니다. 통상적으로 에이전트가 작가로부터 받는 인세는 기본적으로 수익의 10퍼센트인데, 그 액수를 받기 위해 긴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수익이 되지 않으므로 에이전트가 국내 작가를 발굴하려는 의지를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가 이야기산업을 지원한다면 이 부분을 지원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출판사와 신인 작가가 연락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하는 것, 민간이 하던 국가가 하던 이 부분이 현재의 콘텐츠 부족 문제를 해결할 길이라고 토론자는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온라인에서는 저작물을 업로드 및 공유하고, 오프라인에서는 작가와 업체가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줄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올댓스토리의 강성삼 토론자님은 소통의 부재가 현 콘텐츠 부족 사태의 원인이라 보았습니다. 그는 미국과 국내가 시스템이 유사함에도 국내 콘텐츠가 부실한 것은 작가가 프로듀서에게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없는 문화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토론자는 ‘커버리지’를 대안으로 제시했습니다. 커버리지란 일종의 요약본으로 트리트먼트를 1~5장 정도의 분량으로 요약한 것을 말합니다. 이는 미국 헐리우드 영화 산업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데, 수천편이 넘어가는 시나리오를 영화사 사람들이 일일이 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만들어진 현실적인 타협안입니다. 따라서 국내에서도 프로듀서를 설득하기 위한 프레젠테이션에 힘을 빼기보다는 커버리지 한 두 장에 효율적으로 아이디어를 담아 전달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토론자는 ‘번역’을 제 2의 창작자로 인정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음지에서 미드, 일드 자막을 제작하는 사람들을 양지로 끌어와 제 2의 번역작가로 양성해 정당한 수익을 나눠 받을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레진코믹스의 서현철 토론자님은 만화 유통의 관점에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토론자는 결과물과 사람 중 하나를 택하라면 사람을 택하겠다면서 결과물에만 집착하는 현 콘텐츠 발굴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토론자는 플랫폼에서 원석을 발굴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줘야 한다며 일본의 ‘코미케’를 예로 들었습니다. 코미케란 일본의 대형 동인문화행사로써, 2차 저작물등의 결과물을 직접 거래하는 직거래 장터가 커진 행사라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소비자와 창작자의 만남도 있을 뿐만 아니라 출판업계 사람들도 직접 참가해 자신들의 방향성과 맞는 사람을 직접 발굴해내기도 한다고 합니다. 토론자는 한국에도 이와 유사한 만남의 장이 필요함을 역설했습니다. 토론자는 국내의 만화 인재 발굴의 장으로 네이버의 ‘대학 만화 최강자전’을 거론했습니다. 네이버에서 대중적 인지도를 얻고 수상하면 네이버에서 연재할 수 있는 일종의 등용문인 이곳은 다만 네이버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 위주로 선발된다는 단점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토론자는 공개된 토너먼트나 대회를 주기적으로 열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게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공모대전을 코미케의 형식을 빌려 ‘페스티벌’ 형식으로 열 것을 제안했습니다.



▲사진3 ‘이야기보호 및 산업 활성화를 위한 법률적 기반’


참신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면 이빨 없는 호랑이가 될 뿐입니다. 법의 보호 없는 이야기는 이를 노리는 사람들에게 물어 뜯겨 결국 무단도용의 희생양이 될 것입니다. 기존까지는 이야기산업에 대한 법률적인 보호가 전무하다시피 했습니다. 이야기는 저작권법의 테두리로만 묶기에는 정의상 애매하고 광범위한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발제자 김현수 한남대학교 교수의 발제로 시작된 이 토론에서는 법률 전문가 분들이 이야기의 법적 정의부터 법적 용어까지 세세하게 논의 했습니다. 

  

메타기획컨설팅의 정종은 토론자님과 전국영상미디어센터협의회의 류지영 토론자님은 법률에서 ‘이야기’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법조문에 들어있는 ‘센터’를 ‘플랫폼’으로 바꾸는 게 나을지 등 세밀한 용어에 파고드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단어 한 글자로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것이 법의 영역인 만큼 사소한 부분에도 신경 쓰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또한 두 분들은 해외에 유사 법안이 있는지 찾아보고 법을 만드는 현재의 법체계를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노조의 활발한 활동이 적은 우리나라의 특성상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한 바, 이야기산업 보호를 민간에만 맡길 수 없다는 것이 두 분의 공통적인 의견이었습니다.

  

부산대학교의 계승균 토론자님은 가능하면 법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이지만 이야기산업 진흥법의 필요성에는 크게 공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작가를 보호하는 문화풍토였으면 없었을 법이 논의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는 의견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토론자는 이야기산업 진흥법이 상정되면 이야기에 권리가 있다는 뜻이고, 그 권리를 어디까지 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는 저작물 보다 넓은 개념이라 정의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법률적으로 ‘이야기’를 정의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부작용 등을 고려해야 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기존의 저작권법과 겹치는 부분을 최소화 하기 위해 인력양성, 소재 발굴, 유통 등을 다루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으며 유통업무를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맡는 것이 좋을 것 이라 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토론자는 이 법이 통과되었을 때 에이전트 역할을 국가가 해주어 작가들이 창작에만 전념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견으로 발언을 마쳤습니다.


발전은 과정에 대한 응원과 결과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있을 때 있을 수 있습니다. 과정을 응원하지 않으면 의욕이 사그라지고, 결과를 보상하지 않으면 새로운 성과를 만들 의지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야기를 만들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도전할 수 있게 응원을, 이야기를 만든 이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이익이 없도록 제대로 된 보상을 주어야 합니다. 이야기산업을 보호하려는 시도가 아직 걸음마 단계임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각계각층에서 많은 논의가 오가고 있고, 논란도 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산업을 활성화하고 보호하겠다는 공감대는 많은 전문가들 사이에서 형성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이 콘텐츠 강국인 이유는 ‘이야기’에 강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에 강하다는 것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의 안정된 수익을 보장해주고, 그들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스토리텔러가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콘텐츠가 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전제조건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은 이미 섰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보다 많은 논의의 결과로 스토리텔러가 제대로 대우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오길 바랍니다. 그때가 한국 콘텐츠의 진정한 전성기이기 때문입니다.




※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