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만물과 세상사에 꾸준히 지속되는 것이 없음을 표현하는데 이만한 말도 없습니다. 불같은 사랑도 권태기가 오기 마련이고, 영원히 함께할 것 같던 젊음은 다가오는 주름살에 놀라 저만치 달아납니다. 새로 계획한 습관도 유지하기 힘들때가 많죠. 그만큼 한결같기는 힘든 것이고, 지속한다는 것은 많은 노력과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한 분야에서 40년을 변함없이 살아온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요? 동료 만화가들이 꿈을 포기할 때에도, 군사정권의 외압이 들어올 때에도, 만화 시장이 정체기를 맞았을 때에도 그는 꾸준히 만화를 그리고 만화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총 215편. 한국 만화계의 거장 혹은 전설이라 부르는 허영만.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하고 있는 ‘허영만展-창작의 비밀’(이하 허영만전)을 직접 방문해봤습니다.



▲사진 1 연보별로 분류된 허영만 작가의 저서들


허영만전 전시장에 처음 입장하면 작가가 40년간 출판했던 모든 책들이 연보별로 나란히 진열되어 있습니다. 흡사 소형 만화방의 규모와 맞먹는 광경을 보면 작가의 만화에 대한 열정을 몸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전시된 책 사이사이에는 해당 연도의 역사적 분위기가 작가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작가의 첨언이 보입니다. 그 역사적 증언을 간간히 읽으면서 작품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편의 역사 다큐멘터리를 몸소 체험한 느낌을 받습니다. 책장 앞에는 종이로 작가의 실제 오른손 엄지손가락 지문을 형상화한 작품이 있습니다. 마치 우여곡절 많았던 그의 만화 인생을 표현하는 듯한 작품입니다. 


▲사진2 허영만 작가의 작품 215편


조형물 옆에 위치한 벽에는 허영만 작가가 그동안 연재했던 모든 작품의 제목들이 허영만 작가의 자필로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부끄러울 정도로 많이 했습니다.’라는 말로 맺음 짓는 이 벽에서 우리는 한 작가의 숨기고 싶은 과거와 영광을 느낄 수 있습니다.



2014년을 강타했던 ‘미생’과 인기 웹툰 ‘이끼’의 윤태호 작가가 허영만 작가의 문하생이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번 허영만전에는 독특하게도 윤태호 작가를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윤태호 작가를 아끼던 허영만 작가의 제자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전시실 초입에 붙어있는 허 작가의 친필 메모와 벽에 옮겨 놓은 글귀를 읽어보면 허영만 작가가 윤 작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당신들의 것이다.’라는 말 이후 ‘윤태호에게 지지 않겠다.’로 끝나는 글귀는 제자를 북돋우면서도 한 편으로 제자를 라이벌로 인정하는 스승의 따뜻한 응원 메시지입니다. 스승의 응원 글귀 뒤에 펼쳐진 전시실에는 윤 작가가 문하생 시절 그렸던 그림들과 현업 웹툰 작가로 등단한 이후 그렸던 작품들이 나란히 전시되어 ‘포스트 허영만’에 대한 기대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사진3 허영만 작가가 윤태호 작가에게 남긴 메모 글귀



‘허영만의 더 깊숙한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회의 몸통이라 생각합니다. 이곳은 허영만 작가의 삶에 대해 진솔하게 서술한 전시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대가의 삶은 어떨지 궁금해 합니다. 이 전시실에서는 허영만 작가의 일과표와 일상 사진, 화실 사진을 전시해 놓음으로써 사람들의 궁금증을 풀어줍니다. 이 전시실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작가의 일과표와 일대기입니다. 작가의 일과표를 바라보면 작가의 40년 만화 인생이 이 일과표 14,000여장이 쌓인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 대단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술’과 ‘낮잠’을 좋아하는 작가의 인간적인 면도 읽을 수 있어 친근감도 접할 수 있습니다. 사람 키만 한 크기의 종이에 숫자로 요약한 작가의 일대기 앞에서는 괜스레 숙연해집니다. 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10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하는 열정이, 90세가 될 때 까지도 현역으로 남겠다는 의지가 몸으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메모지와 명언으로 가득한 화실의 전경과 현장 취재 사진들에서 프로로서의 면모를 접할 수 있는 한편, 작가의 일상 사진들과 일에 집중하느라 자식과 보낸 시간이 없었음을 아쉬워하는 글귀에서 허영만 작가도 우리네 아버지들과 같은 한 집안의 가장임을 느낄 수 있어 마음 한 구석이 푸근해집니다.


▲사진4 허영만 작가의 일과표



이번 전시회가 남다른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바로 작가의 원화를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각시탈 원고와 작가의 원화 중 엄선된 원화를 전시해 놓은 전시실이 그것입니다. 그 중 각시탈 원고는 작가의 자료실에서 40년 만에 발견되어 의미가 큰 바, 각시탈 원고만을 위한 전시실을 따로 갖추었습니다. 초입에 붙은 1권의 첫 컷부터 하나하나 읽어가다 보면 어느덧 전시실 말미에 있는 마지막 컷이 다가오는 게 원망스럽습니다. 원화 전시실에 걸린 작품들도 작가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대담한 터치가 잘 드러난 수작들이어서 보는 눈이 즐겁습니다.


▲사진5 각시탈 분장을 한 사람(가운데) 



마지막 전시실인 ‘만화 레시피’에서는 만화의 창작과정을 허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을 통해 배워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는 작가가 실제로 사용하는 것과 같은 모델의 액정태블릿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태블릿이란 컴퓨터 입력장치 중에 하나로, 넓은 패드나 특수 액정, 전자 펜을 이용하여 컴퓨터에서 마치 손으로 필기하는 것과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 주는 장치입니다. 관람객은 이 액정태블릿 위에 직접 그림을 그려보면서 오늘날의 만화/웹툰 창작 과정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자가 취재 했던 날에는 꼬마 숙녀 예술가 한 분이 작품을 그리는데 심취해 있어서 액정태블릿을 직접 체험해 볼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전시관 바깥 ‘제 3전시실’에 비치된, 실제 만화가들과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애용하는 태블릿을 써보면서 작가들의 창작의 고통을 대리 체험해 보았습니다. ‘만화 레시피’ 전시실에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허영만 작가의 최신 연재 웹툰 ‘커피 한 잔 할까요?’를 읽을 수 있는 뷰어와 인쇄물입니다. 


▲사진6 허영만 작가가 연재중인 ‘커피 한 잔 할까요?’



▲사진7 허영만 작가의 다짐


영화 ‘역린’에도 나와 유명해진 중용 23장에는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노력하는 사람이 결국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이는 역으로 노력하기가 세상을 바꾸는 것만큼 힘들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노력한다는 것은 자신과 싸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신과 싸우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의 단점을 가장 잘 아는 적이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허영만 작가는 40년 세월 동안 자신과 부단히 싸웠습니다. 혹독한 외압과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포기하자는 마음의 유혹을 뿌리친 허 작가는 그 결실로 한국 만화계의 거장이라는 지위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거장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허영만 작가는 후배 작가들의 전진을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극하고 배울 것을 찾고 있습니다. 전시장에 걸린 허영만 작가의 일대기 속에는 40년 간 작가가 화실에서 외로이 싸워온 역사를 읽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길에서 최선을 다 하시나요? 기자는 인정하기 싫지만 허영만 작가의 일대기 앞에서 ‘아니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기부여가 필요한 분들은 지금 ‘허영만展-창작의 비밀’ 전시장으로 달려가 작가가 쌓아온 시간과 노력의 결과물 앞에서 압도되어 봅시다. 그리고 전시실에 설치된, 작가의 화실 촬영 영상을 보면서 한 인생의 전쟁터가 들려주는 소리 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봅시다. 쉼 없이 달려왔고 지금도 현장에서 뛰고 있는 허영만 작가님의 열정에 존경을 표합니다.


*위 기사는 다음주 ‘허영만展-창작의 비밀’ <下> 편으로 이어집니다.


ⓒ사진 출처

- 표지 ‘허영만展-창작의 비밀’ 홈페이지




※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