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를 넘어 장소를 보는 대중문화의 눈(眼)

상상발전소/방송 영화 2015.01.29 11:50 Posted by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 상상발전소 기사 공모전 수상작 / 이대원  -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는 ‘공간’과 ‘장소’를 구분합니다. 공간은 인간에 의해 명명(命名)되지 않은, 추상적이고 낯선 공간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간은 구체적인 장소가 아닌 개념적으로만 존재하는 곳입니다. 이에 비해 장소는 경험적인 자산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구체적인 장소를 말합니다. 그래서 장소는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공간과는 다르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재하는 곳입니다. 최근 대중문화에서 ‘장소성’에 집중한 콘텐츠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즉흥적인 상황에만 집중하던 기존 콘텐츠와 달리 이들은 서사의 진행보다는 장소성의 변화를 중심으로 자신만의 독특함을 획득하고 있습니다. 서사가 아닌 장소를 보는 눈. 이러한 콘텐츠의 약진은 대중문화에 신선한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 사진1,2 tv N 드라마 <미생>



2014년 하반기를 뜨겁게 달군 드라마는 역시 tvN의 <미생(未生)>이었습니다. <미생>의 가장 큰 인기 비결 중 하나는 바로 살아있는 회사 현장, ‘상사맨’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에 있습니다. 거기다가 웹툰에서 볼 수 없었던 인물의 특징과 잘 다듬어진 드라마 구성은 영상 매체가 만드는 가능성을 다양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미생>의 주 무대는 ‘원 인터네셔널’이라는 무역회사입니다. 처음 회사는 주인공 ‘장그래’에게 익숙하지 못한 곳이었습니다. 서툴고 낯선 공포가 그를 덮쳐왔고 회사는 자꾸만 자신을 밀어내는 이질감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장그래는 영업 3팀과 입사동기인 안영이, 장백기, 한석율과 부딪히고 사귀면서 회사에 대해 ‘을’의 입장에서 ‘갑’으로 탈바꿈합니다. 더 이상 회사는 낯선 직장인들의 공간이 아닌 ‘자기 회사’가 된 것입니다. 비록 그가 회사에 계속 남을 수는 없었을지라도 장그래는 나름 멋진 상사맨으로 성장합니다. 사람들이 공간을 장소로 바꾸고 다시 장소는 사람을 성장시킵니다. <미생>은 사람들의 땀 냄새와 믿음으로 공간을 장소로 바꾸는 힘을 보여줍니다.



▲ 사진3,4 JTBC 예능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라는 공간은 우리나라에서 보편성과 개별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장소입니다. 누구에게나 학교에는 공통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지만, 누구나 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학교는 언제나 대중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JTBC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는 이러한 학교의 특징을 전문에 내세우면서도 다른 콘텐츠와는 차별성을 가지고 나타났습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는 출연자들이 ‘학생’이라는 점보다는 이들이 지내는 장소가 ‘학교’라는 점에 더 집중합니다. 출연자들은 일주일 동안 모든 수업을 듣고 야간자율 학습을 합니다. 심지어는 기숙사에서 실제 학생들과 함께 자며 동고동락합니다. 처음 이미 학교를 졸업하지 오래된 ‘늙은 고등학생’들은 모든 것이 신기하고 낯설게 느껴집니다. 아직 그곳은 학교라는 ‘공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그곳은 더는 학교에 머무르지 않고 ‘생활 장소’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출연자는 연예인들이 아닌 바로 실제 고등학생들입니다. 그들은 자신 스스로를 감추지 않고 솔직히 드러내면서 자연스럽게 촬영과 프로그램에 녹아듭니다. 


이러한 훌륭한 기반을 바탕으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는 거대한 촬영 무대 하나 없이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지 않고도 다른 프로그램이 달성하지 못했던 누구나 가진 학창시절 추억과 예능의 재미를 함께 성취하는 능력을 보여줍니다. 

 

 

▲ 사진5,6 MBC 예능 <나 혼자 산다>



지금까지 이런 예능은 없었습니다. MBC <나 혼자 산다>는 1인 가구의 리얼리티를 보여주는 신선함으로 금요일 저녁 시간대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을 끌어모았습니다. '예능'과 정적인 '1인 가구'라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에도 <나 혼자 산다>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사는 집, 동네, 생활이라는 삼박자의 만남입니다. 이들은 실제 자신들이 사는 동네 이외에도 가끔 들르는 장소들도 학교, 낚시터, 직장 등을 누빕니다. 특별한 일 없이도 매일을 살아가는 그들의 일상은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환기하게 시킵니다. 또한, ‘집’이라고 하는 가장 당연시하면서도 집중해 본 적 없던 장소를 <나 혼자 산다>에서는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이사를 하고 집을 청소하고 꾸미는 작업을 하면서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고 혼자 살아가는 생활 속에 가족과 친구,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러오면서 <나 혼자 산다>는 '집' 중심의 예능을 만들어 냈습니다. 익숙함을 낯설게 만들고, 다시 그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찾는 장소에 대한 생각의 전환이 <나 혼자 산다>가 가진 매력이자 힘입니다. 




우리를 굳이 규정하자면 육지에 사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태생적 원인으로 인해 공간과 장소에서 인간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지내야 할 공간에 대해 ‘장소화’를 시도합니다. 결국, 살아가야 할 공간이라면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인간이 가진 일종의 본능이라면 본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익숙함’은 감정의 차원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잡아끄는 콘텐츠의 매력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위의 프로그램들은 우리 몸에 새겨진 익숙함을 다시 길어올립니다. 그리고 그토록 당연하다고 믿었던 장소들을 공간처럼 낯설게 만드는 기획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자신과 장소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게 합니다. 직장, 학교, 집으로 이어지는 일상의 장소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각각의 사람들은 사실 타자가 아닌 우리 자신입니다. 이제 더는 낯선 타자의 공간이 아니라, 익숙한 우리의 ‘장소’가 되어가는 변화를 겪게 됩니다. 공간은 물질적으로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소는 사라질 수 없는 실재인 곳입니다. 이제 TV는 서사와 캐릭터에 의존하던 기존의 방식을 넘어서 장소와 일상인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경지의 문화 콘텐츠를 이룩하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사진 출처
- 표지 JTBC
- 사진1, 2 tvN
- 사진3, 4 JTBC
- 사진5, 6 MBC
 





※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