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아두고 싶은 순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좋은 책을 읽다가 맨 끝 장을 넘기는 순간같이. 지난 4월, 다음 만화속세상에 <달이 내린 산기슭>의 마지막 화가 업데이트되던 날 독자들의 아쉬움 가득한 댓글에서 그 속내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1년 남짓한 연재 기간에 ‘치유 만화’라 불리며 독자의 마음을 두드렸던 만화 <달이 내린 산기슭>의 손장원 작가를 만나 보았습니다. 



▲ 사진1 만화가 손장원



지층, 화석, 노두(암석이나 지층 따위가 지표에 드러난 부분). 지질학 서적에나 나올 법한 이 소재들을 아름답게 풀어낸 이야기가 있었으니, 바로 손장원 작가의 <달이 내린 산기슭>입니다. 사실 <달이 내린 산기슭>은 웹툰으로 첫선을 보인 작품은 아닙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지질학 박사 학위 취득 후 만화가가 된 손장원 작가는 만화잡지에 <달이 내린 산기슭>을 연재하던 중 갑작스럽게 연재를 중단하게 됩니다. 이야기를 끝맺지 못한 그는 남은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일념으로 나머지 분량을 웹사이트에 게재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중 다음 만화속세상에 정식 연재를 하게 됐습니다. 


드라마틱한 갈등 구조, 육감적인 캐릭터, ‘큰 웃음’을 유발하는 설정, 박진감 넘치는 격투 장면 등 ‘인기 만화’가 갖고 있을 법한 요소라고는 하나도 없는 <달이 내린 산기슭>은 분명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거나, 눈에 띄는 판매고를 올린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손장원 작가의 ‘어디서도 보지 못한 만화’에 갈채를 보냈습니다. 지층 때문에 울고 웃고, 가슴이 내려앉는 신선한 경험을 선사한 손장원 작가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Q1. 주요 작품을 중심으로 간략한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1. 정식 연재를 통해 발표한 장편은 아직 <달이 내린 산기슭> 하나뿐입니다. 단편으로는 <달이 내린 산기슭>의 프롤로그 격인 <산>이나 <반짝이는 별빛 아래> <별의 경계>가 있고, 비공식적으로 웹사이트에 게재한 작품으로는 <여름이 지나간 자리> 등 이 있습니다. 


Q2. <달이 내린 산기슭>은 어떤 이야기인가요? 

A2. <달이 내린 산기슭>은 지질학 박사 원경이 지층의 정령을 만나고, 이별하기까지의 이야기를 풀어낸 작품이다. 주인공 원경은 고생물 화석을 캐러 전국을 돌아다니는 지질학자인데, 어느 날 우연히 흥월리층의 정령인 월리를 만나게 됩니다. 월리는 원경에게 ‘가이드가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원경을 따라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을 떠나 추억을 쌓는다는 이야기입니다.

▲ 사진2


Q3. 데뷔작으로 이런 특이한 소재를 선택한 이유와 이야기를 발전시켜나간 과정이 궁금합니다. 

A3. <달이 내린 산기슭>은 어떻게 보면 자전적인 작품이라고 도 볼 수 있습니다. 연구를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있었던 일들, 그 당시에 상상했던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대학원 재학 중 연구를 위해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토지개발 때문에 산이 잘린 모습을 보며 ‘저 산은 분리되었으니, 어린 산신령이 새로 생겨 나는 것일까?’ 같은 상상을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정령이 나타나서 이 지층에 관해 설명해주면 편할 텐데’ 같은 생각도 했고. (웃음) 마침 출판사에서 ‘지질학이라는 소재가 참신하니 장편으로 발전시켜보라’는 제안을 받았고, 당시의 경험을 살려 이야기의 틀을 짰습니다. 익숙한 장소를 배경으로 넣고, 익숙한 소재를 선택했으니 이야기도 술술 풀렸습니다.

 

Q4. 별도의 자료 조사는 하지 않았나요? 

A4. 지질학에 내 청춘을 오롯이 바쳤으니, 어찌 보면 자료 조사만 10년을 한 것입니다. (웃음) 매화 에피소드를 짤 때면 그곳에 대한 자료를 다시 정리해야 하니까 그 작업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3~4일 정도는 예전에 찍어둔 사진과 그 지역 지도, 그리고 전문 정보를 꼼꼼히 검토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오류가 있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Q5. 자칫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는 소재를 쉽게 풀어냈습니다. 특히 어려운 용어가 나올 때마다 등장하는 ‘몰라도 되는 지층 이름’ 같은 주석이 재미있었는데요. 

A5. 잡지 연재 시절 편집부에서 전문 용어에는 주석을 달아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전문 용어를 설명하는 것이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야기 진행상 굳이 알 필요 없는 지층에는 ‘몰라도 된다’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웃음) 주석만으로도 독자들이 최소한의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때로는 웃고 넘어가면 더 좋겠다는 바람이었습니다. 


Q6. ‘만화가가 되기 위해 서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 있습니다. 그렇게도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이유나 계기가 있는지요? 

A6.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만화가를 꿈꿨고,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단지 좋아서. 그것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원성을 살지도 모르지만, 과학고등학교 재학 당시 나는 전교에서 꼴찌를 도맡아 하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함께 만화동아리 활동을 하던 친구들이 모두 서울대에 진학하겠다고 해서 나도 서울대학교를 목표로 공부했습니다. 만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지질학을 전공했던 것도, 내가 입학할 때만 해도 만화학과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Q7. 동아리에서는 어떤 활동을 했나요. 

A7. 고등학교 재학 시절 만화동아리 ‘그림자들’을 결성했고, 동아리 멤버들과 함께 대학에 진학하고서도 계속 만화를 그렸습니다. 봄, 가을이면 회지를 발행해 판매하기도 하고. 그때 만화를 가장 열심히 그렸고, 동아리 멤버들과 작품에 대한 토론도 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슶니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친구들도 지금 여전히 만화를 그리고 있습니다. 다음 만화속세상에 <공길동전>을 연재했던 최가야 작가, 네이버 베스트도전에 <너무 예쁜 거 아니니 꼬무야>를 연재 중인 지한솔 작가 등 모두 내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고마운 동료들입니다. 



▲ 사진3



Q8. 작품이 참 담백하고, 잔잔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면을 더 좋아해 주는 독자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A8. 감사한 일이지만, 반대의 의견도 많았습니다. 연재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악당은 언제 나오느냐’는 질문도 받았고, 한참 강원도를 잘 돌아다니고 있는데 ‘본격적인 모험은 언제부터 시작하느냐’ 등의 말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반전이나, 그 흔한 악당도 그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상적인 이야기가 하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소소해서, 캐릭터와 이야기가 더 사실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Q9. 다음 만화속세상에 <달이 내린 산기슭>을 연재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요. 

A9. <달이 내린 산기슭>은 원래 2011년 학산문화사의 월간 만화 잡지 <부킹>에서 연재하던 만화입니다. 그러던 중 <부킹>이 월간 <찬스>와 통폐합해 <찬스 플러스>에서 이어서 연재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연재가 중단되었습니다. 지면 연재 중단 후 다음 작품을 고민해봤지만, <달이 내린 산기슭>을 마무리 짓기 전에는 다른 작품을 도저히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존 연재 분량을 웹툰의 특성에 맞게 컷을 재배치하고 채색하는 과정을 거쳐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정식 연재가 결정되었습니다. 



▲ 사진4 <달이 내린 산기슭>



Q10. 본인의 경험으로 비추어 봤을 때, 출판만화와 웹툰의 대비되는 특징이 있다면? 

A10. 양쪽 다 경험하긴 했지만, 워낙 특이한 경우인 데다가, 제대로 겪었다고 볼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독자의 즉각적인 반응을 알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습니다. 만화잡지에서 연재할 때는 ‘한 달 동안 공들인 작품인데, 누군가 내 만화를 보긴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할 만큼 실감이 나지 않았다면, 웹툰은 거의 실시간으로 독자들이 댓글을 달아주기 때문에 신세계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물론 수치로 드러나는 부분은 조금 무섭습니다. 하지만 추천 수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을 보며 조금씩 내 만화의 독자가 늘어나는구나 싶어 기뻤습니다.


출판만화는 편집기자가 콘티 단계, 완성된 원고 상태에서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검토하고 수정해준다는 점도 차이점입니다. 웹툰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고, 출판만화는 편집부를 거쳐 어느 정도 표현이 정제됩니다. 편집부의 도움이 없으니 요즘에는 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콘티단계에서 대사를 써놓으면 친구들이 말투를 다듬어주고, 맞춤법을 교정해줍니다. 또, <달이 내린 산기슭>을 보면 중간에 함백산 산신령이 원경에게 ‘월리 옷 좀 어떻게 해봐. 안 귀여워’라고 말하는 부분이 있는데, 실제로 나는 그런 부분에 센스가 부족해 친구들이 조언을 해주곤 합니다. 


오히려 작업 방식에는 거의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출판만화도 디지털 작업을 하니까. 물론 채색이라는 어마어마한 작업이 있긴 하지만. 스크롤 편집이나 식자 작업 등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일까. 


Q11. <달이 내린 산기슭>의 댓글 중 ‘지층 때문에 슬퍼지다니, 이런 경험 처음이야’ ‘이런 만화 그려주셔서 고맙다’라는 글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쩌면 만화가로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아닐까요. 

A11. 이렇게 인기 없는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독자들이 있어서 정말 힘이 됩니다. (웃음) 댓글은 창작자의 동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약간 의도가 다른 해석이나 독자들 간의 의견 충돌이 있을 때면 마음이 괴롭기도 했습니다. 


Q12.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다른 작가의 작품이나 영향을 받은 작품은 없나요? 

A12. 두루두루 좋아하는 편입니다. 순정만화도 좋아하고, 액션물, SF, 개그물, 명랑만화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소년만화는 순정만화 같은 섬세한 감정선이 부족하고 순정만화는 소년만화 같은 다양한 콘텐츠를 조명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아쉬움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양쪽의 색깔을 모두 가진 작품이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기가 없지만. (웃음) 


Q13. 마감에 쫓겨 밤을 새울 때도 잦을 것 같은데요. 

A13.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세이브 원고가 많아도 마감이란 언제나 촉박합니다. 그런데 그건 창작자로서의 욕심인 것 같기도 합니다. 조금만 더 하면 그만큼 원고 퀄리티를 높일 수 있을 것 같아서 마감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잠은 덜 자고, 그림은 더 그립니다. 물론 나는 반 이상 미리 그려놓은 작품을 연재한 것이라 지각한 적은 없습니다. 가까스로 칼마감을 했지요. (웃음) 


Q14. 차기작으로는 어떤 작품을 계획하고 있나요? 

A14. 첫 장편에서 가장 익숙한 소재를 다뤘으니 앞으로는 다양한 장르의 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아직 공개할 정도의 수준은 안되지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SF 장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SF도 한국에서는 기피하는 장르 중 하나지만 나처럼 조금은 마이너한 작품을 하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나요. 다음번에는 더욱더 인기 없는 작품을 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웃음) 


Q15. 작품을 이끌어가며 견지하는 태도나 창작자로서 가진 비전에 대해 들려주세요. 

A15.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평화롭고 이상적인 세상’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악당이 없어도, 갈등이 없어도 세상은 재미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 각자의 시각을 갖고 공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나는 내 만화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었으면, 그리고 그로 인해 이상적인 세상을 함께 꿈꿀 수 있다면 좋겠다는 내 멋대로의 희망을 갖고 만화를 그립니다. 그런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듭니다. 그래야 누군가 ‘왜 만화를 그리느냐’고 물었을 때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 숭고한 뜻이 있다고!’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요. (웃음) 앞으로도 나만의 색깔이 있는,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해 주는 만화를 그리고 싶습니다. 



ⓒ 사진 출처

- 표지 (주)학산문화사

- 사진1 김창제(249 studio)

- 사진2~4 (주)학산문화사, 창조산업과 콘텐츠



본 기사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정기간행물 <창조산업과 콘텐츠> 11·12월호(http://bit.ly/1qnAi9f)에서 발췌하였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