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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발전소/KOCCA 행사

[문화원형스토리] 만능 엔터테이너의 원조, “기생”

by KOCCA 2014. 1. 17.

사진 1. 그림을 그리고 활을 쏘는 기생의 모습


우리는 ‘기생’이라고 하면 흔히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고 사내들에게 몸을 내어주는 여자’라고만 생각하고 있는데요. 사실 기생은 춤, 노래, 그림, 시조, 문학을 아우르는 종합예술인이었습니다. 왕족이나 학문적 수준이 높은 사대부들과 시조와 글을 함께하는 지식인계층이었으며, 재능과 덕목을 고루 갖춘 교양인만이 엄격한 교육을 통해 기생이 될 수 있었죠. 뛰어난 재능을 갖춘 예술인이었지만 미천한 신분이기도 했던 기생들의 이야기, 문화콘텐츠닷컴을 통해 소개합니다. 



◎ 명월관 최고의 기생 ‘산홍’


 

사진2. 조선요릿집 명월관


우리나라 최초 조선 요릿집 ‘명월관’은 당대의 내노라하는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술, 요리와 함께 담소를 나누던 공간이자 인물과 성품이 뛰어난 명기들이 모여있는 사교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명월관에서 인기가 최고였던 기생 ‘산홍’에게 친일파 ‘이지용’이 거금 1만원을 주며 소실로 삼으려 했지만 산홍은 ‘기생에게 줄 돈 있으면 나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명월관 기생들이 산홍의 이름이 적힌 우산을 들고 직접 행렬하며 명월관을 홍보했을 만큼 산홍이 당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기생이었습니다.



◎ 기생 양성을 전문으로 하는 ‘평양기생학교’


 

사진3. 평양기생학교에서 수업 중인 학생들의 모습


조선 말기인 1900년대에는 기생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평양기생학교’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1년 3학기제로 운영됐으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주일 단위로 시간표도 짜여져 있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6교시, 토요일은 4교시까지 단축수업을 진행되었던 것도 특징입니다. 또한 기생학교는 학생들에게 숙식까지 모두 제공해줬습니다. 때문에 일반 학교를 다니다가도 집안에 변고가 생기면 기생학교로 옮기는 여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 조선 최초의 단발머리 기생 ‘강향란’


 

사진4. 1920년대 신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단발머리


우리나라에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1920년대에는 단발머리를 한 여성들도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단발머리를 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고, 조선 민족의 가정과 미래를 어둡게 하는 위험한 행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1922년, 한 측량 강습소에 머리를 깎고 남장을 한 젊은 여자가 등장했습니다. 남자들과 함께 공부하겠다는 의지로 당당히 남장를 하고 측량 강습소에 나타난 것이었죠.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인 행위였기 때문에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가게 되어 당시 동아일보에 그의 사진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조선 최초의 단발머리 기생인 강향란입니다. 


 

사진5. 동아일보 1922년 6월 24일자에 실린 강향란의 사진


14살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그녀는 후에 서울에서 최고로 이름 날리는 기생이 되기 이릅니다. 그러다 20살이 되던 가을,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기생 일도 접게 됩니다. 그는 애인을 통해 다양한 근대 학문을 배우게 되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와 근대적 사상을 접하게 되었는데요. 이를 계기로 “여자도 굵게 살자면 남자만 못하지 않다”라는 생각을 가지며 단발머리를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이러한 강향란의 파격적인 행동은 같은 기생이나 배우,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신여성을 자칭하는 이들은 기존의 구습과 악습에 대해 저항할 것을 촉구했으며, 예속적인 삶을 상징하는 긴 머리를 과감히 잘라낸 것입니다.



◎ 기생에서 독립운동가로… ‘정칠성’


 

사진6. 여중, 여고를 돌아다니며 연설하는 정칠성 (일러스트)


1919년 3월 1일은 일제의 침략통치에 반대하며 자주독립을 외치던 날입니다. 당시 온 민족이 독립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는데요. 그 중에서도 기생들은 학문적 지식과 의식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구국을 위해 앞장서는 존재였습니다. 당시 ‘기생에게 무슨 애국심이 있겠냐’며 무시하던 일본 경찰들도 한국의 기생은 독립투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진7. 대정권번에 있을 당시 촬영된 금죽 정칠성의 사진 (출처 : 영남일보)


그 중에서는 특히 정칠성이라는 기생이 유명했습니다. 금죽이라는 기생 이름으로 활동하던 그녀는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로 변신하게 됩니다. 1924년에는 여성 해방운동을 위한 조선여성동우회를, 25년에는 사회주의 운동단체인 삼월회를 결성했으며, 27년에는 항일 여성 운동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장이 되는 등 독립운동과 여성 계몽운동에 몸을 던져 활동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반공을 국시로 내건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월북하였으나, 북한에서는 국내파(남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는 기생 출신이라는 신분을 극복해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여성들의 계몽에 노력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신여성이었습니다.


이제는 과거가 된 기생들의 이야기. 그 속에서 그녀들의 삶과 문화, 예술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부여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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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기생>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사진출처

- 모든 사진은 문화콘텐츠닷컴 <기생>, <신여성문화>, <조선최초요릿집 ‘명월관’>에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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