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금지된 사랑의 비극은 그녀로부터 시작되었다.

상상발전소/KOCCA 행사 2012. 10. 26. 20:13 Posted by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금지된 사랑을 꿈꾼 여인과 마지막 유언의 노래  


금지된 사랑과 뒤 따르는 비극적 결말은 현대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소재입니다. '금지된 사랑의 끝은 비극'이라는 공식을 누가 만든 것도 아닌데 드라마나 영화들은 이런 스토리를 반복하는 것일까요? 


그런 스토리에 대중이 열과하는 이유는 그만큼 극적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주변에 실제 있음직한 이야기이기 때문이 아닐까합니다. 그리고 그 비극적 이야기의 시작을 찾아가다보면 구한말 한 여인과 그녀가 남긴 한 곡의 노래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조선시대 문화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비련의 여주인공, 윤심덕과 그녀가 남긴 마지막 곡 '사의 찬미'입니다.    

  



                                       


 ▲ 윤심덕의 마지막 곡 사의 찬미 (1926) 작사 김우진/곡 이바노비치/노래 윤심덕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건 설움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의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건 설움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윤심덕, 한국 최초의 여성 소프라노

 

윤심덕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성악가일 뿐 아니라 최초의 여성 국비유학생, 최초의 대중가수, 최다 레코드 판매 보유 등 한 시대를 풍미한 당대 최고 여성 예술인이었습니다. 평양 출신으로 경기여고-일본 우에노 음악학교를 나온 윤심덕은 미모와 지성을 소유한 세련된 신여성이었죠.

 

 

▲ 한국 최초의 여성소프라노 윤심덕 ⓒ문화콘텐츠닷컴

 

1910년 대, 암울한 일제강점기 시대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를 정도면 윤심덕의 재능은 물론이거니와 배짱과 포부 역시 남달랐을 것이라 여겨지는데요. 아래 전언은 윤심덕의 지인이 전해 준 이야기로, 짧은 일화 속에서도 그녀의 호탕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언제인가 그야말로 육척이나 되어 보이는 몸에 옥색치마를 발뒤축까지 끌고 평안도 수건을 맵시 있게 눌러쓰고 평양 천지를 횡행하다가 종로 네거리에서 어떤 청년 남자를 만나서 평안도 사투리로 '야 오랍아 너 잘 있댔니'하고 손을 절레절레 흔드는 것을 보았다” (조선일보 1926년 12월 26일자)


  

 1923년 귀국과 동시에 동아부인상회 창립 3주년 기념음악회에서 데뷔공연을 가진 이래 일본 이또(일東)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체결하여 앨범을 취입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여온 그녀가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 비운의 주인공으로 후세에 기억되고 있는 탓은 무엇일까요.

 

  


윤심덕,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1925년 ‘메기의 추억’을 취입한 첫 레코드 발매 이후 대중문화로 영역을 확장하여 대중가수, 방송 사회자, 패션모델 등으로 활동한 윤심덕. 이런 그녀의 신여성적 행보보다 사랑과 비운의 아이콘으로 기억되는 것은 1921년 김우진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 윤심덕(좌)과 김우진(우) ⓒ 문화콘텐츠닷컴

 

 

 1921년 동경에서 유학생과 노동자 모임인 동우회 순회공연에서 윤심덕은 소프라노로 찬조 출연하게 됩니다. 와세다 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표현주의 연극 기법을 도입해서 조선연극이 ‘신파’를 벗어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 김우진은 그 당시 이미 유부남이었습니다.

 

  

 이런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에는 그 당시에도 많은 비난이 따릅니다. 자유연애와 조혼의 비극, 당대 일본과 조선의 청년층에 풍미했던 염세주의와 동반자살 풍조는 결국 극단적 선택을 이끕니다. 1926년, 김우진은 지독한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에 가득 찬 가사를 입힌 <사의 찬미>의 레코딩을 마치고 서로의 사랑을 비관하여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자살하면서 조선과 일본 양국을 발칵 뒤집어 놨습니다. 녹음과 동시에 자살함으로써 이 곡은 일종의 스완곡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 당시 윤심덕과 김우진의 동반자살을 다룬 신문 ⓒ 한국콘텐츠닷컴

 

 

 분명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은 인정받을 수 없는 잘못된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실 속에서 극단적 선택을 내릴 수 밖에 없었던 두 젊은이들의 금지된 사랑과 암울했던 시대적 배경은 역설적이게도 그녀의 비극을 더합니다. 



 실제 <사의 찬미>의 주 멜로디는 이바노비치(losif lvanovich)의 왈츠곡 <도나오 강의 잔물결>입니다. 설레는 두근거림이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연인들의 왈츠를 강의 잔물결로 표현한 원곡이기에 윤심덕의 <사의 찬미>는 더욱 극적이고 구슬프게 들립니다.

 

  

 누군가는 도나우 강을 보며 연인들의 왈츠를 떠올렸고, 어느 누군가는 그 왈츠곡을 들으며 이루지 못하고 비극으로 남을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반된 사랑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해탄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녀의 소프라노가 '사의 찬미'로 남아 더욱 애잔히 들리는 이유 아닐까요.


 

윤심덕 연보


1800년대 
1897 평양 남산재 교회 권사 부부의 1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남. 언니 윤심성은 소프라노, 남동생 윤기성은 바리톤, 여동생 윤성덕은 피아노를 전공한 음악 가족.


1900년대 
1907 진남포 사립여학교 입학. 그후 평양 숭의여학교,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
1918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졸업.
1919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름.
1923 귀국, 동아부인상회 창립 3주년 기념음악회에서 데뷔공연.
1925 극단 토월회 입단.
1925 일본 이또(日東)레코드와 전속계약. ‘메기의 추억’을 테너 안기영과 취입. 그 외에 ‘어여쁜 색시’, ‘나와 너’, ‘아 그것이 사랑인가’, ‘어머니 부르신다’, ‘망향가’, ‘방긋 웃는 월계화’ 등도 취입.
1926 일본 오사까에서 ‘사의 찬미’외 24곡 취입.
1929. 8. 4 새벽 4시 시모노세끼를 출발한 부관연락선 두쿠슈마루(德壽丸)를 타고 대마도를 지날 무렵 김우진과 투신.
사건 후 ‘사의 찬미’가 담긴 레코드 10만장 판매 기록. 



 

    

 


※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