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지역특화문화콘텐츠 전성시대!

상상발전소/만애캐 2016.09.29 13:22 Posted by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사진 1. <케이콘텐츠> - 세계와 소통하다 지역 콘텐츠


지역문화콘텐츠는 더 이상 수도권 사업을 위한 조연이 아니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들은 특색을 통해 자신만의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이어 내려오는 명맥은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스토리로 승화되었고, 친숙함 가득한 캐릭터는 지역의 색깔을 고스란히 입었다. 널리 퍼져 보편화된 수도권에 비해 차별화된 뿌리에서 출발하는 지역 콘텐츠들은 이제 한국의 다채로운 희망이 되고 있다. 이번 기사에서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원하는 지역특화문화콘텐츠개발사업에 선정된 콘텐츠들을 통해 지역의 강점을 알아보고 미래의 문화콘텐츠에 대해 전망하는 시간을 가져본다.


사진 2. <얼씨구나 벌떡, 와불와불> 뮤지컬 포스터



<얼씨구나 벌떡, 와불와불>은 전남 화순 운주사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와불 전설을 모티브로 한 가족 국악 체험 뮤지컬이다. 호기심 많은 소녀 단지가 동자승으로 되돌아가고픈 머슴불과 하늘의 별이 되고자 하는 칠성돌을 만나 와불을 일으키기 위해 떠나는 여행을 담고 있다. 2014년 전남, 광주 스토리랩 최우수 수상에 빛나는 이 뮤지컬은 탄탄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많은 이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사진 3. <얼씨구나 벌떡, 와불와불> 뮤지컬


또한 화려한 시각 효과 속 번뜩이는 내용으로 어린이들에게 상상력과 우정의 의미를 선사해 가족 뮤지컬로 큰 주목을 받았다. <얼씨구나 벌떡, 와불와불>기존의 뮤지컬 형태와 더불어 모티브가 된 화순 운주사에서 마당극 형태로 진행되어 소통하는 참여형 뮤지컬로 소개되고 있다. 지역의 문화콘텐츠를 기반으로 관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보이는 <얼씨구나 벌떡, 와불와불>. 이어 내려오는 전설로 만들어내는 문화콘텐츠의 힘과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기회이다.


사진 4. <이야기 배달부 동개비> 리플렛 이미지

 


<이야기 배달부 동개비>()스튜디오 피쉬하이커가 제작한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 2015KOCCA 지역특화문화콘텐츠개발 지원사업에 선정된 작품이다. 이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동개비2014KOCCA 지역 전통캐릭터개발지원사업을 통해 탄생한 캐릭터로 광주 남구 양림동의 문화원형인 300년 전 개비설화를 배경으로 하는 글로컬 브랜드이다.


사진 5. <이야기 배달부 동개비> 애니메이션 스틸컷


사진 6. <이야기 배달부 동개비> 2016 서울캐릭터페어 탈인형 이벤트

 

한편 동개비 캐릭터는 2015년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원하는 창조관광공모사업에 선정되어 현재 광주 양림동에 <이야기 배달 부동개비> 캐릭터관광샵을 운영하고 있다. 동개비 관련 캐릭터상품 판매, 동화 구연, 동개비 홍보동영상, 동개비 페이퍼토이 체험 등 다양한 행사가 정기적으로 진행된다. 또한 남구관광청과 연계한 근대예술여행사업’, ‘문화의 날 행사 쌀롱드양림프로그램도 진행 중에 있다. <이야기 배달부 동개비>는 현재 2016 카툰커넥션, 2016 서울 SPP, 2016 서울캐릭터페어, 2016 광주에이스페어, 2016 서울국제문구페어 등에 참가하며 세계적인 캐릭터들과 어깨를 견주는 글로컬 관광브랜드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진 7. <발달린 꼬등어> 애니메이션 소개 이미지

 


부산 시어를 모티브로 제작되어 부산시민에게 큰 사랑을 받아온 꼬등어가 이번엔 Full HD 3D 애니메이션으로 찾아온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지원하는 2016년 지역특화문화콘텐츠 사업에 선정된 <발달린 꼬등어 : 생존시리즈>는 총 30편의 개성 넘치는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부산 특유의 바다 내음과 즐거움을 전한다. 메인 캐릭터 꼬등어를 포함, 나비, 매기, 꽃께씨가 서브 캐릭터로 등장하며, 30초라는 짧은 시간 안에 빠른 공감과 재미를 주는 감각적인 애니메이션을 선보일 예정이다.


사진 8. <발달린 꼬등어> 애니메이션 샘플 컷 (참조이미지)


사진 9. <발달린 꼬등어> 팬시 부스

 

이번 애니메이션은 주 타깃이 젊은 청년층인 만큼 뉴미디어를 통한 적극적인 홍보마케팅을 펼칠 계획이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SNS, 유튜브를 비롯해 주요 공공시설 내 영상 플랫폼, 관련 전시 및 행사 참가 등 다양한 서비스가 소비자들의 눈앞까지 찾아간다. 이미 수십 가지의 제품군이 개발된 꼬등어는 인기 제품과의 연계를 통해서도 애니메이션 홍보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달린 꼬등어를 개발한 ()디자인부산은 지역의 고유 브랜드를 활용하여 세계적인 인지도를 갖춘다는 포부 아래 다각적인 부가사업을 펼치고 있다. 물고기라는 보편성을 바탕으로 세계를 넘나드는 글로컬 캐릭터 꼬등어의 행보가 기대된다.

 

사진 10. <제라진 탐라수호대> 포스터

 


제주도 곶자왈을 수호하는 유쾌한 슈퍼히어로 제돌이는 제주 대표 상징물인 돌하르방을 기반으로 제작한 3D 캐릭터이다. 제돌이는 2011년도에 지역특화캐릭터사업을 통해 탄생되어 그동안 <제주국제감귤박람회>, <사회적경제한마당등 제주도 내의 공인과 환경사업의 홍보대사로서 활동해왔다. 최근에는 유네스코로부터 소멸 위기의 언어로 지정된 제주어를 알리기 위해, 캐릭터로서는 최초로 크라우드펀딩을 진행하여, 천만 원이 넘는 모금액을 일주일 만에 달성하기도 했다.



사진 11. <제라진 탐라수호대> 애니메이션 스틸컷


사진 12. <제라진 탐라수호대> 제돌이 스토리펀딩

 

제돌이는 현재 환경을 테마로 한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제라진 탐라수호대>를 개발 진행 중이다. 제주도의 특별한 환경인 곶자왈 숲을 배경으로 진행되는 애니메이션은 제주도를 침략해온 외계인에 맞서 싸우는 제돌이와 꼬마 돌하르방 탐라수호대의 활약을 다루고 있다. 또한, 국내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탐구형 에듀테인먼트 애니메이션으로 어린이들이 어렵게만 느낄 수 있는 환경문제 (지구온난화, 백화현상, 황사) 등을 쉽게 탐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특징이다. 제돌이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생태 골든벨을 개최하는 등 지역사회를 위한 캠페인 및 교육프로그램 개발하는 한편, 해외 바이어들과의 적극적인 교류를 꾀하며 글로컬 캐릭더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다져나가는 중이다.

 

사진 13. 지역문화콘텐츠 캐릭터 모음 (전남, 광주, 부산, 제주)

 

다양한 지원을 통해 지역을 기반으로 세계시장에 도전하는 글로컬 콘텐츠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사람과 역사, 지역의 특색을 통해 다양한 모습을 가지며 국내외에서 경쟁력을 갖춰가는 중이다. 하지만 잠깐의 반짝임이나 개인의 노력만으로 자생력을 갖추기는 힘들다. 지역 콘텐츠에 당장 성과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독이 될 수 있다. 생겨나는 글로컬 콘텐츠들이 어떤 가능성이 있으며, 어떤 분야에서 강점을 나타낼지에 대해 꾸준한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면 한국의 콘텐츠 산업의 미래는 한층 다채로운 면모를 갖출 것이라 기대한다.


사진 출처

사진 1. <2016년 7_8월 케이콘텐츠>

사진 2, 3. <얼씨구나 벌떡, 와불와불> 제공

사진 4~6. ()스튜디오피쉬하이커 제공

사진 7~9 ()디자인 부산 제공

사진 10~12 시와월드 제공

사진 13. 자료 취합 후 직접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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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한 문화원형, 콘텐츠로 재탄생하다!

상상발전소/방송영화 2016.01.12 10:00 Posted by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최근 개봉한 영화 <도리화가>가 조선시대 판소리 명창 진채선의 실화를 다룬 독특한 스토리로 기대를 모았습니다. 이번엔 문화원형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용어가 생소하게 느껴지는 분들이 있을 텐데요. 쉽게 말해, 우리나라에서 반 만년동안 축적돼 온 전통문화 콘텐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잘 활용 한다면 우리나라만이 가진 독특한 콘텐츠가 만들어 지겠지요. 그만큼 문화원형은 콘텐츠 분야에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는 요소인데요. 그 성공적 활용 사례에는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볼까요?



국내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뮤직비디오의 예술성을 인정받은 그룹 빅뱅. 그들의 뮤직비디오에 인상적인 장면이 등장했습니다. 달 아래에서 강강술래를 하는 모습이었는데요. 


▲ 사진 1 빅뱅 <BAE BAE> 뮤직비디오 장면


신비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우주를 배경으로, 뮤지션들이 달 아래에서 손을 맞잡고 도는 모습이 인상 깊습니다. ‘곤룡포’라고 불리는 왕이 입었던 옷을 멋스럽게 재해석한 모습도 눈에 띄네요. 


▲ 사진 2 CL <나쁜기집애> 뮤직비디오 장면


CL의 뮤직비디오에도 문화원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저 아래 숫자 놀이판, 아시는 분들도 있을 텐데요. 저의 경우 어릴 때 많이 해 본 놀이라 익숙합니다. 팔방놀이라고 하는 민속놀이 인데요, 땅에 놀이판을 그리고 숫자를 그린 다음, 돌멩이를 던져서 숫자 사이를 폴짝폴짝 뛰면서 함께 어울리는 게임입니다. 이렇게 뮤직비디오에 현대적인 모습으로 등장하는 우리의 전통문화. 신선하지 않나요?



여러분. 우리 전통문화인 판소리를 최근에 들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안타깝지만 가요에 비해 잘 들어볼 일이 없지요. 하지만 판소리는 조선시대, 양반과 서민을 잇는 대중문화라 해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영화 <도리화가>는 판소리 명창 ‘진채선’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요. 여성은 판소리를 할 수 없던 시절. 판소리계를 책임졌다고 해도 좋을 신재효에게서 발탁돼, 명창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스토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 사진 3 영화 <도리화가> 포스터


“스물 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신재효가 직접 진채선에게 지어준 판소리 첫 대목이라고 합니다. 신재효가 애제자 채선을 얼마나 아꼈는지 짐작해 볼 수 있겠죠? 더욱이 한류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 배우가 영화에 출연함으로써, 외국 팬 여러분들에게도 우리 문화를 간접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 사진 4 판소리 명창 ‘진채선’의 실화를 다룬 소설


판소리는 조선 후기 에 등장했는데요, 당시 사회는 전통적인 신분제가 흔들리고 민중의 각성이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종교나 주술 보다는 흥미와 현실을, 그리고 초자연적 영웅담보다는 일상생활이 담긴 문학을 선호했던 것이지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심청전, 춘향전, 흥부전 등이 판소리로부터 온 것입니다. 이쯤 되면, 조선시대 대표 콘텐츠라 불러도 무방하겠죠? 비록 우리나라가 근대화 되면서 쇠퇴하긴 했지만, 여전히 우리 민족의 얼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계속 이어나가야 할 전통문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2010년에 연재를 시작해, 현재까지도 인기를 이어가고 있는 웹툰 <신과 함께>가 영화화가 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신과 함께>는 일본 내에서도 리메이크될 정도로 우리나라 콘텐츠의 저력을 보여주고 있지요. 이번엔 저승사자라고 할 수 있는 ‘강림’역에 하정우씨가 캐스팅되었다고 하는데요. 원작이 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는 만큼, 개봉할 영화에 대해서도 기대가 큽니다.


▲ 사진 5 <신과 함께> 일본판 리메이크 버전 표지


각 나라의 문화적 차이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사후세계와 이승에 대한 인식이 아닐까 합니다. <신과 함께>는 저승, 이승, 신화 총 3가지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각 시리즈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우리 조상들이 생각했던 세상을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만나, 재미와 감동을 주고 있지요. 


▲ 사진 6 전통설화에 나오는 강림도령의 모습


배우 하정우가 역을 맡은 ‘강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강림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것은 죽을 때가 된 사람을 데리러 오는 세 명의 저승차사 중 하나인 ‘강림도령’이라고 합니다. 강림도령은 붉은 천으로 된 명부를 들고 그 마을에 데려갈 사람의 집으로 가지만 매번 집안을 지키는 신들이 때문에 영혼을 잡아가는 데 번거로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이런 그도 본래는 젊은 청년이었으나, 저승차사가 된 사정이 있다고 하네요. 어딘지 인간적인 면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 실제로 작가가 집안의 신들이 강림도령에게 저항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도심 속 아파트나 주택에 많이 사는 요즘, 저 역시 우리 집을 지키는 신이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사는데요, 오히려 전통 설화가 신선하게 느껴지는 부분입니다.


어떤가요. 위의 콘텐츠들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따라 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문화원형은 더욱이, 저작권이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데요. 그렇기에  글로벌 콘텐츠 제작에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문화원형에 대한 정보는 한국콘텐츠 진흥원이 운영하는 컬처링(www.culturing.kr)에서 자세히 찾아볼 수 있으니, 참고해도 좋겠지요.


생활상이 옛날과는 확연히 달라진 탓에, 오늘날에는 오히려 우리가 전통문화에 공감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면 재미와 희소성 두 가지를 동시에 잡을 수 있지 않을까요? 다양한 부분에서 활약하고 있는 문화원형 콘텐츠들! 여러분이 생각하는 매력적인 전통문화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사진출처

- 표지, 사진3 도리화가 공식 페이스북 

- 사진 1,2 YG엔터테인먼트 유튜브  

- 사진 4 도서출판 밝은세상

- 사진 5 애니북스

- 사진 6 문화콘텐츠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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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에서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원형의 나아갈 길을 찾다

상상발전소/방송영화 2014.04.09 13:54 Posted by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 내용 중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진1 영화<만신>포스터



2014년 3월, <만신>은 다양성 영화로는 드물게 관객수 3만 명을 돌파하였습니다. 그것도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이런 흥행 성적이라는 것은 이례적인 일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측면에서 의의가 있겠지만, 영화의 소재인 만신, 그리고 한국 콘텐츠계의 화두인 문화원형과 관련 지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간단히 영화에 대해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만신이란 무당을 높여 이르는 말입니다. 만 개의 혼을 몸에 담는, 신과 인간 사이의 존재이기 때문에 만신(MANSHIN: Ten Thousand Spirits)이라 칭합니다. 영화에서는 우리나라 최고의 만신으로 일컬어지는 김금화 만신의 삶을 세 부분으로 나눠 다룹니다. 어렸을 때부터 비범하였으나 남들이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는 이유로 핍박 받는 소녀 김금화 넘세(김새론 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신의 숙명을 받아들이며 한국전쟁의 시기를 견뎌낸 새만신 김금화(류현경 분), 전통이 천대받던 근대화의 한가운데에서도 존재함만으로 만신의 필요성을 다시금 증명해 낸 1970년대의 김금화(문소리 분)가 그것입니다.


 

▲사진2 영화<만신> 스틸컷  



<만신>이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갖는 시사점은 다양합니다. 먼저 기본적으로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장르의 경계를 허문 영화였다는 점 입니다. 김금화 만신 본인이 등장하여 본인의 이야기를 진술하거나 기록된 영상이 삽입되고 이것이 황석영 작가와 민속학자 황루시 교수 등 전문가들의 진술로 뒷받침된다는 점에서 다큐멘터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중간중간 삽입되는 배우들의 연기와 애니메이션은 김금화 만신의 삶을 단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반영하여 재창조합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애니메이션 등 여러 장르를 오가는 <만신>의 구성은 신과 인간의 경계에 선 만신이라는 존재와 흡사한 것으로도 보입니다. 


포스터나 홍보물을 스틸컷 등의 일반적인 홍보 형태를 벗어나 그림으로 형상화한 것도 특이한 점입니다. 이수역에 위치한 다양성영화관 아트나인에서는 <만신>의 포스터 및 팜플렛 디자인을 담당한 김지평 아티스트와 만신의 콜라보 아트워크를 볼 수 있습니다. 영화관의 분위기도 살려 주고, 홍보 효과도 가지는 새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지요.

 


▲사진3 아트나인에 전시된 영화<만신> 아트워크



◎ 용서받았기에 눈 감았던 역사의 아픔, <만신>으로 주목 받다.

 

이와 같이 <만신>의 매력은 다양하지만, 여기서는 영화의 내용과 조금 더 연관을 시켜 보겠습니다. 앞서 김금화 만신을 연기한 세 배우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혹 세 만신의 공통점을 찾으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고난’입니다. 1931년 출생 이후로 우리나라의 흐름과 삶을 함께 해온 김금화 만신은, 인생의 어느 때에도 고통을 면한 적이 없었습니다. 위안부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겪은 그녀 자체가 한국의 아픈 근 현대사 자체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만하면 그만 핍박 받아도 될 만한데, 해방 이후에도 새마을운동과 근대화의 일환으로 굿과 만신은 샤머니즘의 하나 정도로 치부되며 역사에서 밀려납니다. 결국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존재이기 때문에 신과 한국인을 가장 잘 연결해줄 수 있는 존재임에도 우리는 무당을 찾는다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에서도 언급하듯 우리나라 사람들은 만신을 ‘저급한 것으로 치부되면서도 급한 일이 있으면 찾게 되는’ 이중적인 시선으로 보게 되었나 봅니다.

 

영화에서는 꾸준히 만신이 이러한 시선에 대응하는 방식은 복수가 아닌 ‘용서’라고 말합니다. 이 영화의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종교적인 색채를 지우고 바라보아도, 만신은 우리나라의 수백 년 역사를 몸에 담은 존재입니다. 동시에, 이례적일 정도로 다재 다능한 배우이기도 하지요. 


전세계적으로 종교의례가 관객을 고려한 노래와 춤만으로 이루어진 경우는 드물뿐더러, 만신은 거의 오페라나 연극 하나에 해당하는 분량을 홀로 해냅니다. 불운을 복으로 바꾼다는 그녀의 소원과 같이, 영화 속 만신은 시대와 사람들의 압박에 무너지기보다 오히려 그것을 굿에 녹여냅니다. 그렇기에 김금화 만신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미디어에 노출되면서도 오히려 카메라까지 굿의 일부로 승화시키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만신>의 진정한 매력은 우리가 너무나도 터부시해왔던, 그리고 그녀가 너무나도 견디어 왔던 이 부분을 수면 위로 끌어왔다는 데 있습니다. 영화를 보며 우리는 만신이 우리 역사에서 정신적‧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문화원형이자 정신적 지주를 우리가 얼마나 주변으로 밀어냈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지금까지 만신을 비롯한 잊혀져 가는 우리의 문화원형들을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은 끊임없이 있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신>은 이러한 노력이 좋은 스토리텔링 방식과 적절한 실험적 시도를 만나 흥행했을 때 어떠한 파급 효과를 가져오는지를 몸소 보여준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위에 언급한 장르의 파괴, 독특한 홍보 방식 등도 역시 결국은 우리가 멀리했던 만신이라는 소재에 대해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장치의 역할을 해낸 것이겠죠. 다양성 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비롯, <비단꽃 넘세>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었다가 절판된 <만신 김금화>의 재판이나 무대인사 및 관객과의 대화에의 성원 등이 그 증명입니다.

 


▲사진4 영화<만신> 스틸컷



◎ 이제는, 우리가 먼저 우리 것을 되살릴 때!

 

만신과 우리 굿은 우리가 역사에 치여 당신을 천대시할 때에도 문화적 매력과 종교적 포용력으로 감싸 준 소중한 존재입니다. 만신 뿐만이 아닙니다.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도 근대화의 압박도 사라진 지금, 우리 민족을 지탱해준 문화의 많은 부분이 역사의 물결에 휩쓸려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만신>을 통해 이러한 문화원형들이 실제로 갖고 있는 민족적 설득력과 힘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을 감싸 줄 차례입니다. 문화원형의 콘텐츠화는 문화원형을 수면 위로 올리는 데에 아주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문화원형의 재발견과 더불어 그에 맞는 표현 방식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만신>의 경우 신과 인간의 경계에 선 만신이라는 소재를 살린 탈 장르적 형식과 동양적 아트워크 등이 한몫 했지요. 물론 적절한 표현 방식이라는 것은 문화원형의 본질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파악할 수 있겠죠? <만신>의 뒤를 이을 우리 문화 콘텐츠를 기대합니다.


 

 ⓒ 사진 출처

사진1,2,4 영화<만신>공식홈페이지

사진3 화가 '김지평' 블로그(http://jipyeong.eglo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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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화원형스토리] 풍문으로 들었소, 조선후기 시장 이야기

상상발전소/기타 2014.01.28 14:00 Posted by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진 1. 구한 말, 건물 벽 아래 좌판을 벌여 놓은 난전 상인의 모습

 

얼마 전 1만 명의 눈길을 사로잡은 ‘부천 원종 종합시장 플래시몹’ 유튜브 동영상을 보셨나요? 따뜻하고 정겨운 우리의 재래시장 모습과 그 안에서 여러 사람들이 함께 부르는 캐롤은 보는 이와 듣는 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나 익숙하고 정겨운 재래시장! 조선후기 시장의 문화원형스토리를 살펴보고 이번 설 대목을 맞이하여 재래시장에 다시 온기를 가져다 주는 것은 어떨까요?



◎ 시장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사진 2. 기산 김준근의 기산풍속도첩 속 장터의 모습


사극 드라마의 단골 장소, ‘저잣거리’. 우리가 TV를 통해 흔히 들어왔던 ‘저자’는 시장의 순 우리말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시장이 처음 열린 것은 신라 시대의 일입니다. 이 시기부터 시장은 서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우리나라 경제 생활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죠. 특히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시장이 바로 5일장과 같은 정기시장일 텐데요. 이 정기시장이 처음으로 형성된 것은 15세기 후반 전라도 지방에서입니다.


처음 정기 시장이 출현했을 때, 농민들이 농경 일보다 상공업에 집중하게 될 것을 우려하는 반대세력이 심했다고 해요. 하지만 곧 충청도, 경상도 지방으로 시장이 확산되었고 시장을 통한 상품교역은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18세기에는 전국에 1천여 개의 정기시장이 개설되었고 정기시장은 지역주민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요소로 자리매김했습니다.



◎ 왜 5일장일까?


사진 3. 현재의 5일장 모습


요즘에는 상설 시장이 흔한 형태이지만 처음에는 상설시장보다 어느 정도 날짜 간격을 둔 정기 시장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시장의 공급장인 농민들에게 매일매일 상품을 공급할 만큼 대규모의 공급처가 있었을 리 없었겠죠? 따라서 농민의 생산규모에 맞추기 위해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이 필요해 5일장과 같은 형태가 생긴 것이죠. 또한 당시의 평민들이 시장까지 모이려면 쉽지 않은 여정이었는데요, 매일이 아닌 5일 간격으로 시장에 나가는 것이 여행 거리를 줄이는 방법이었다고 합니다. 



◎ 과거, 시장에서 정보를 얻다


사진 4. 조선 후기 시장을 찾은 서민들의 모습


옛말에 ‘시골장에서 파는 사람이 곧 사는 사람이고 사는 사람이 곧 파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경제적 교환은 물론이고 이와 같이 사회적 교환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그래서 시장은 현재의 인터넷과 같은 역할을 하는 ‘정보의 바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문이나 뉴스도 없던 과거에 조정은 시장을 통해 중요한 소식을 알리기도 했다고 해요. 조정과 지방수령은 왕의 법령을 시장에서 반포하여 곳곳의 백성들에게 효율적으로 알릴 수 있었죠.    

조정에서의 소식뿐 아니라 백성들도 민심을 전하기 위해 시장을 활용했는데요. 과거의 시장길목은 백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담은 대자보를 붙이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시장에 가면 예나 지금이나 여러 가지 소식을 들을 수 있는 메카였네요.



◎ 현대 시장에서는 볼 수 없는 상인들


사진 5. 왼쪽부터 조선 후기 시장의 ‘꽈배기 장수’, ‘바구니 장수’, ‘나막신 장수’의 모습


조선 후기 시장에는 지금은 볼 수 없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상인들도 많았습니다. 

미남계로 많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을 것 같은 젊은 ‘꽈배기 장수’에서부터 진기명기를 보는 듯, 자신의 키를 넘는 바구니를 매고 장사를 하러 다니던 ‘바구니 장수’, 비 오는 날 서민들의 발을 책임졌던 ‘나막신 장수’까지. 생존을 위해 힘들게 일을 했지만, 시장 안에서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활기찼습니다. 파는 물건의 종류도 셀 수 없이 많았던 과거의 시장에서는 그들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컸을 것 같네요.



◎ 지금의 재래시장은?

 

사진 6. 현대화한 죽도 시장


재래시장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삶 속에 깊이 자리하여 개인과 개인, 촌락과 촌락을 연결해주는 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조용하던 농촌을 북적거리게 만들어주던 장날. 사거나 팔 것이 없더라도 구경 삼아 시장에 가던 당시 시장은 문화를 공유하고 정을 나누는 활기찬 공간이었습니다. 

현대의 재래시장은 상품권과 주차장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이전보다 더욱 인심과 편리함을 갖추어 나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번 새해 차례상은 재래시장에서 준비해 보는 것이 어떨까요? 넉넉한 인심으로 한 번, 저렴한 가격으로 또 한 번 훈훈해진 마음으로 추운 겨울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문화콘텐츠닷컴에서는 전국의 재래시장의 분포 현황을 담아 장이 열리는 날짜와 장소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가까운 곳의 유명 시장도 알아보고 직접 방문해 올 설을 준비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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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2013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조선 후기 시장> 프로젝트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사진출처

- 모든 사진은 문화콘텐츠닷컴 <조선 후기 시장>에서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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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문화원형스토리] 만능 엔터테이너의 원조, “기생”

상상발전소/기타 2014.01.17 13:52 Posted by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사진 1. 그림을 그리고 활을 쏘는 기생의 모습


우리는 ‘기생’이라고 하면 흔히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고 사내들에게 몸을 내어주는 여자’라고만 생각하고 있는데요. 사실 기생은 춤, 노래, 그림, 시조, 문학을 아우르는 종합예술인이었습니다. 왕족이나 학문적 수준이 높은 사대부들과 시조와 글을 함께하는 지식인계층이었으며, 재능과 덕목을 고루 갖춘 교양인만이 엄격한 교육을 통해 기생이 될 수 있었죠. 뛰어난 재능을 갖춘 예술인이었지만 미천한 신분이기도 했던 기생들의 이야기, 문화콘텐츠닷컴을 통해 소개합니다. 



◎ 명월관 최고의 기생 ‘산홍’


 

사진2. 조선요릿집 명월관


우리나라 최초 조선 요릿집 ‘명월관’은 당대의 내노라하는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술, 요리와 함께 담소를 나누던 공간이자 인물과 성품이 뛰어난 명기들이 모여있는 사교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명월관에서 인기가 최고였던 기생 ‘산홍’에게 친일파 ‘이지용’이 거금 1만원을 주며 소실로 삼으려 했지만 산홍은 ‘기생에게 줄 돈 있으면 나라 위해 피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명월관 기생들이 산홍의 이름이 적힌 우산을 들고 직접 행렬하며 명월관을 홍보했을 만큼 산홍이 당대를 풍미했던 최고의 기생이었습니다.



◎ 기생 양성을 전문으로 하는 ‘평양기생학교’


 

사진3. 평양기생학교에서 수업 중인 학생들의 모습


조선 말기인 1900년대에는 기생을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평양기생학교’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1년 3학기제로 운영됐으며,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주일 단위로 시간표도 짜여져 있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6교시, 토요일은 4교시까지 단축수업을 진행되었던 것도 특징입니다. 또한 기생학교는 학생들에게 숙식까지 모두 제공해줬습니다. 때문에 일반 학교를 다니다가도 집안에 변고가 생기면 기생학교로 옮기는 여학생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 조선 최초의 단발머리 기생 ‘강향란’


 

사진4. 1920년대 신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단발머리


우리나라에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1920년대에는 단발머리를 한 여성들도 등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단발머리를 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고, 조선 민족의 가정과 미래를 어둡게 하는 위험한 행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1922년, 한 측량 강습소에 머리를 깎고 남장을 한 젊은 여자가 등장했습니다. 남자들과 함께 공부하겠다는 의지로 당당히 남장를 하고 측량 강습소에 나타난 것이었죠. 당시로서는 너무나 파격적인 행위였기 때문에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가게 되어 당시 동아일보에 그의 사진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조선 최초의 단발머리 기생인 강향란입니다. 


 

사진5. 동아일보 1922년 6월 24일자에 실린 강향란의 사진


14살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그녀는 후에 서울에서 최고로 이름 날리는 기생이 되기 이릅니다. 그러다 20살이 되던 가을,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기생 일도 접게 됩니다. 그는 애인을 통해 다양한 근대 학문을 배우게 되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와 근대적 사상을 접하게 되었는데요. 이를 계기로 “여자도 굵게 살자면 남자만 못하지 않다”라는 생각을 가지며 단발머리를 행동에 옮긴 것입니다. 이러한 강향란의 파격적인 행동은 같은 기생이나 배우,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신여성을 자칭하는 이들은 기존의 구습과 악습에 대해 저항할 것을 촉구했으며, 예속적인 삶을 상징하는 긴 머리를 과감히 잘라낸 것입니다.



◎ 기생에서 독립운동가로… ‘정칠성’


 

사진6. 여중, 여고를 돌아다니며 연설하는 정칠성 (일러스트)


1919년 3월 1일은 일제의 침략통치에 반대하며 자주독립을 외치던 날입니다. 당시 온 민족이 독립에 대한 열망이 뜨거웠는데요. 그 중에서도 기생들은 학문적 지식과 의식 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구국을 위해 앞장서는 존재였습니다. 당시 ‘기생에게 무슨 애국심이 있겠냐’며 무시하던 일본 경찰들도 한국의 기생은 독립투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진7. 대정권번에 있을 당시 촬영된 금죽 정칠성의 사진 (출처 : 영남일보)


그 중에서는 특히 정칠성이라는 기생이 유명했습니다. 금죽이라는 기생 이름으로 활동하던 그녀는 3•1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로 변신하게 됩니다. 1924년에는 여성 해방운동을 위한 조선여성동우회를, 25년에는 사회주의 운동단체인 삼월회를 결성했으며, 27년에는 항일 여성 운동단체인 근우회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장이 되는 등 독립운동과 여성 계몽운동에 몸을 던져 활동했습니다. 이후 그녀는 반공을 국시로 내건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월북하였으나, 북한에서는 국내파(남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김일성에게 숙청되어 안타깝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는 기생 출신이라는 신분을 극복해 독립운동에 뛰어들고 여성들의 계몽에 노력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신여성이었습니다.


이제는 과거가 된 기생들의 이야기. 그 속에서 그녀들의 삶과 문화, 예술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부여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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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기생>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사진출처

- 모든 사진은 문화콘텐츠닷컴 <기생>, <신여성문화>, <조선최초요릿집 ‘명월관’>에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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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원형스토리] 행운의 아이템 부적이야기

상상발전소/기타 2014.01.13 13:43 Posted by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사진 1. 재물운이 들어오는 금은보화부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관습처럼 부적을 쓰며 "올 한해도 좋은 일만 있게 해주세요."라며 소원을 빌곤 하죠. ‘부적’은 행운을 가져오고 재앙을 막는 주술도구로 아주 먼 옛날 조상들로부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새해를 맞이해 문화원형에 담긴 부적의 역사와 의미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 부적의 기원 ‘처용 화상’


 

사진 2. 처용설화 (처용무)


우리나라에서 부적의 기원으로 대표적인 예는 ‘처용(處容)의 화상’을 들 수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처용이 자신의 아내를 범한 역귀를 죽이는 대신 노래와 춤으로 감복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처용의 태도에 감복을 받은 역귀가 앞으로 처용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곳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에서 부적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 부작에 얽힌 이야기


 

사진 3. 까치 작침부작


종이가 아닌 부적은 ‘부작’ 이라고 부르며, 보통 동물이나 식물을 형상화하여 상황에 따라 주술 도구로 사용되었는데요. 수 많은 종류만큼이나 그에 얽힌 이야기도 다양합니다. <여우 자궁 부작>은 술집접대부나 기생이 지니고 있으면 남성의 인기를 많이 얻을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여우가 사람을 홀리는 묘한 기운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까치 부작>은 까치가 떠난 오래된 집안에 있는 작은 돌을 몸에 지니면 마음을 둔 상대방 사람에게 사랑이 전해진다 믿었고, 부부 금술에도 도움이 된다 하여 조상들이 애용하였다고 하네요.



 

사진 4. 호랑이 귀면 부작


무서운 호랑이 모양의 <호랑이 귀면 부작>은 각종 귀신을 쫓는 부적입니다. 사진에서 보여지는 길고 날카로운 발톱이 포인트인데 실제 호랑이 발톱이 비쌌기 때문에 모형 호랑이 발톱을 만들어서 끼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복을 불러오는 동물, ‘박쥐’

  

사진 5. 박쥐문 반짇고리와 박쥐부작 


부적 속 개, 닭, 호랑이, 거북, 사슴 등의 다양한 동물들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다양한 복을 불러준다고 믿었습니다. 그 중 복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동물 박쥐. 박쥐는 사실 복을 가져다 주는 동물로 자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도와준다고 해서 특히 신혼부부의 가구나 옷장 등에 자개로 많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벌레 퇴치 부적이 있었다?


 

사진 6. 복을 바라는 부적 


“노냉이 각시가 속가에서 천리나 가버리라고 인제 그 부적을 써서 붙이는 거야. …(중략) 그거를 붙여놓고 약을 치고 그랬는데 그 이듬해는 적게 오드라고. 그래서 다시는 안 붙였어." 이 이야기는 부적을 붙이고 벌레를 퇴치하는 효과를 본 재미있는 설화입니다. 전통 마을에 살고 있는 김수갑씨는 마을 전역에 벌레 노냉이가 많이 생겨 고약한 냄새가 나 견디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전해 들어온 대로 노냉이라는 벌레를 없애기 위해 집안 곳곳에 ‘노냉이각시속가천리’라고 쓴 부적을 붙였습니다. 그 이후로는 무슨 일인지 노냉이가 적게 와서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고 합니다. 사실은 부적과 함께 소독약도 뿌렸었다고 하네요. 


부적이란 사람들이 이토록 간절히 바라는 염원을 담습니다. ‘진실로 원하면 그렇게 되리라’ 라는 어디서 많이 듣던 한 구절처럼 부적은 되리라는 믿음을 확고히 해주어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도 같습니다. 올 2014년, 믿음과 확신을 부적 삼아 소망했던 일들을 이뤄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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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2013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전통 부적문화의 원형>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진출처

-모든 사진은 문화콘텐츠닷컴<전통 부적문화의 원형>에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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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원형스토리] 문화를 담은 우리 술 이야기

상상발전소/기타 2014.01.02 14:08 Posted by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이맘때쯤이면 사람들이 모여 그 해 있었던 이야기와 신년 계획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되죠. 이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술입니다. 술자리가 잦아지는 연말연시를 맞이하여 문화원형을 통해 우리 술에 담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사진1. 조선시대 술을 즐기는 조상들



 인류와 함께 한 술


 

사진2. 우리민족의 전통주 ‘약주’


술이 지나온 역사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수렵, 채취시대에 만들어 먹던 과실주가 인류 최초의 술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에 나뭇가지 틈이나 바위가 움푹 팬 곳에 원숭이가 저장해둔 과실이 우연히 발효된 것을 맛본 사람들이 그 맛에 반해 계속 만들어 먹기 시작했고, 이후 술의 발효 비밀을 깨닫게 되어 지역의 기후와 풍토, 생활환경에 따른 자연재료를 이용하여 술을 마시게 되었다는 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잘 만든 누룩이 좋은 술을 만든다.


 

사진3. 발효된 누룩


누룩은 술을 만드는 효소를 지닌 곰팡이를 곡류에 번식시킨 천연 발효제로, 분쇄한 밀이나 쌀 등을 반죽해 모양을 만들고 적당한 온도에서 숙성시킨 것을 말합니다. 누룩은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도경’의 기록을 보면 삼국시대에도 누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조선시대의 문헌 ‘사시찬요초’와 ‘규곤시의방’ 등에 기록된 누룩 제조법을 보면 선조들이 향이 짙고 맛이 깊은 술을 위한 좋은 누룩을 만드는 것에 힘써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한 술이 차보다 낫다” 막걸리


 

사진4. 대중적인 전통주 ‘막걸리’


오랜 세월 우리 민족과 희로애락을 함께해 온 소박하고 친근한 술, 막걸리. 막걸리는 쌀이나 찹쌀 등을 시루에 쪄서 식힌 다음 그 찐 밥에 누룩을 섞고 항아리에 담아 두면 술이 익고, 익은 술을 거를 때 휘저어 거른 술을 말합니다. 예로부터 막걸리는 취하기 위해 마시는 것이 아니라 기쁜 일이 있을 때는 기쁨을 더해주고 슬픈 일이 있을 때는 슬픔을 덜어주며, 힘들 때는 피로를 풀어주는 일종의 피로회복제였습니다. ‘박한 술이 차보다 낫다’라는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막걸리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에게 친근한 대중적인 술이지요.



 새해 복을 기원하는 ‘귀밝이술’


 

사진5. 귀밝이술로 마시는 ‘청주’


정월 대보름 풍습 중 ‘부럼’과 함께 내려오는 “귀밝이술”을 아시나요? 귀밝이술은 설에 차례를 지내고 남은 청주나 집에서 새로 담근 술을 정월 대보름날 아침밥을 먹기 전에 마시는 풍습으로 귀가 밝아지고 한 해 동안 귓병이 생기지 않으며 좋은 소식만을 듣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현재도 대보름에 남녀노소 모두 귀밝이술을 나눠마시며 새해 복을 기원하기도 하지요.



◎ 우리 민족의 정서와 문화가 담겨 있는 술


 

사진6. 떡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주병


인류가 만든 가공음료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술. 향유하는 민족, 지역, 풍습이 반영된 문화의 산물로, 우리 술에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술자리가 잦아지는 연말연시.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우리의 전통주를 마시며 선조들의 정서와 문화가 담겨있는 술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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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한국 술 문화 > 프로젝트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진출처

- 모든 사진은 문화콘텐츠닷컴 <한국 술 문화 >에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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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쓰러져간 슬픈 바위 - 낙화암과 고란사

 

부여읍 쌍북리에 아담하게 솟은 부소산이 있습니다. 서쪽으로 백마강을 끼고 있는 부소산은 산이라고 하기보다는 언덕이라고 할 만큼 낮은 산입니다. 하지만 정상에 올라가 주변의 경관을 둘러보면 아름다운 풍경에 눈길을 빼앗기는 곳입니다. 일찍이 익산 출신의 문학인 이병기 선생은 1929년 발표한 <낙화암을 찾아가는 길에>라는 제목의 수필에서 그 풍경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천송이, 만송이, 꽃밭 속 같은 주위에 있는 여러 산들은 오로지 부소산 하나만을 위해 생긴 듯하고, 경주같이 주위 장산들에게 위압 받는 일도 없고, 한양같이 에워싼 산협도 아니고, 평양같이 헤벌어진 데도 없이…'


▲사진2 부소산성 입구

  

부소산은 백제의 처연한 역사가 서린 곳이지만 지금은 따사로운 햇살과 초록으로 물들어 생동감이 가득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는 조선 후기에 건립한 사비루, 영일루, 반월루, 백화정이 있습니다. 백화정 바로 밑으로는 삼천궁녀가 푸른 강물에 몸을 날린 낙화암이 있고, 강기슭 가까이에 삼천궁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고란사가 있습니다.


▲사진3 부소산성의 산책로

 

걷기 좋게 잘 정돈된 산길을 얼마간 오르다 보면 백제의 궁녀와 부녀자들이 꽃처럼 쓰러져간 슬픈 바위가 보입니다. 그 바위는 '꽃이 떨어진 바위'라는 서글픈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낙화암입니다. 의자왕 20년(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사비도성을 함락하자 도성에 있던 궁녀와 부녀자들이 부소산성으로 피신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곳까지 적들이 밀려들고 적군에게 치욕을 당하느니 충절을 지키기 위해 꽃과 같이 뛰어내렸습니다.


“낙화암에서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슬픈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는가. 얼마나 많은 붉은 충절을 흘렸는가.”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천년이 지나도 백마강이 흐르고 있는 이유는 이 여인들의 눈물이기 때문이며, 낙화암 밑의 절벽이 붉은 빛을 띠는 이유는 이 여인들의 충절을 기억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진4,5 낙화암과 백마강/ 사진6,7 고란사의 전경

 

낙화암 절벽 아래 강기슭에는 고요한 정적 속에 고란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려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절은 꽃처럼 쓰러져간 넋을 돌보기 위한 곳입니다. 절의 벽면에는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지는 내용의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잊지 않으려 벽화까지 그려 놓았지만 환곡의 세월은 고란사 아래로 흐르는 백마강을 따라 흘러가고 지금은 늙은 개 한 마리가 평온하게 낮잠을 즐기고 있습니다. 절 뒤쪽 바위틈에 고란정(皐蘭井)이 있으며, 그 주변에는 다소곳한 고란초가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고란정에서 나오는 약수는 한 사발 마실 때 마다 3년씩 젊어진다 하여 옛 백제의 왕들도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사진8,9 고란사 삼천궁녀 벽화, 고란정의 모습

 

저는 시원한 고란약수 한 사발을 급하게 들이키고 법당으로 들어가 이곳에 서려있는 슬프도록 아름다운 넋을 위해 삼배를 올렸습니다.

 


◎사진 출처

-사진1-9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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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가장 빠르게 변화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통신입니다. 얼굴을 마주해야만 할 수 있었던 이야기들을 지금은 시공간의 제약없이 전할 수 있으니까요. 이러한 통신 수단의 발전은 인간의 통()하고자 하는 욕구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통신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왔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최초의 원거리 통신, 봉수대


▲사진2 봉수대의 모습

 

과거에는 어떻게 통신했을까요? 직접 찾아가거나 서신을 전했습니다. 나라에서는 파발이라는 제도를 두고 역참을 만들어 운용했죠. 덕분에 정보를 주고 받는 일이 빨라지긴 했으나 사람을 통해야 한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습니다. 전쟁처럼 일분일초를 다투는 사안에 있어선 더 빠른 수단이 필요했고 이런 고민의 결과 획기적인 원거리 통신이 등장했습니다. 바로 봉수대입니다.


사진봉수대에 연기를 피워 상황을 나타냄

 

봉수는 횃불과 연기를 뜻합니다. 산꼭대기에 봉수대를 설치해 밤에는 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 오랑캐의 침입을 알렸습니다. 1422년 각 도의 봉수대 시설이 완성되었는데 각 봉수대는 다섯 개의 선을 이루고 있어 최종적으로 한양의 봉수대로 보고가 들어오는 시스템이었다고 합니다.

 


◎ 근대식 우편 제도의 탄생, 우정국


▲사진경성우정국의 모습

 

지금과 같은 근대식 우편제도는 고종 21년에 창시되었습니다. 개항 후 여러 나라와 통신을 주고 받는 일이 많아지면서 기존의 역참제도를 근대 우편제도인 우정국으로 바꾸게 된 것이죠. 우정국은 항구에서 왕래하는 서신을 관장하고, 국내의 우편도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을 겪으며 생긴 지 20일 만에 폐지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 남의 집 마당까지 들어가야 했던 체전부

 

▲사진5 체전부

 

근대식 우편제도가 생기면서 가장 고생한 사람은 아마 체전부일 것입니다. 체전부는 '우편집배원'의 옛 명칭이죠. 물론 지금의 집배원도 물품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오가느라 고생이 많지만 과거에는 웬 사람이 남의 집안 마당을 함부로 들여다본다며 화풀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답니다. 이 기록은 이인직의 소설 <혈의누>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문밖에 와서 안중문을 기웃기웃하며 편지 받아 들어가오, 편지 받아 들어가오 두세 번 소리하는 것은 우편 군사라. 웬 사람이 남의 집안 마당을 함부로 들여다보아. 이 댁에는 사랑 양반도 아니 계신데 웬 젊은 녀석이 양반의 댁 안마당을 들여다보아

 

편지를 전해주러 와선 싫은 소리를 들어야 했던 체전부. 애꿎은 질책을 당한 그의 대답은 이러했답니다.

 

여보 누구더러 이 녀석 저 녀석 하오. 체전부는 그리 만만한 줄 아오

 

  

◎ 전화기 속에 사람이 들어 있어!

 

▲사진6 초기 교환국의 모습

 

전화기는 1893년 청나라를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초기에는 황실의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었으나 전화소가 설립된 이후에는 일반인도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통화를 하기 위해서는 전화와 전화 사이를 연결해주는 교환원을 꼭 거쳐야 했는데 교환원과 인사를 나누는가 하면 날씨를 묻는 등의 재미있는 상황들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공상과학영화에 나오던 화상통화는 이미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스마트폰은 중독의 병폐를 이야기할 정도로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죠. 얇고, 작은 것을 넘어 손목에 감을 수 있게 휘어지기까지 합니다. 봉수대의 연기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앞으로의 통신은 더 빠르게 변할 것입니다. ‘()’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은 끝이 없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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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2004 <조선시대 수영의 디지털복원>, <서울 근대공간 디지털 콘텐츠>프로젝트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 사진출처

- 모든 사진은 문화콘텐츠닷컴 <조선시대 수영의 디지털복원>,

<서울 근대공간 디지털콘텐츠>, <근대초기 한국문화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에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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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원형스토리] 조선왕조 500년의 비결, 왕세자 교육

상상발전소/기타 2013.11.14 13:17 Posted by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수험생과 가족들에게 1년 중 가장 중요한 날, 수학능력시험. 단 하루의 시험으로 그간의 노력을 평가한다는 사실이 학생들에게 큰 부담과 불안으로 다가올 텐데요. 한 번쯤은 ‘내가 왕자나 공주쯤 된다면 이렇게 공부하지 않아도 될 텐데'하는 생각, 해 보신 적 있나요? 그러나 실제 조선왕조의 왕세자들이 어떻게 교육 받았는지 알게 되면 오히려 현재의 수험생들이 행복하다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은 조선 왕세자 교육의 이모저모를 알아보겠습니다.  

 

 

◎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제왕교육

 

사진2 자적용포를 입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영왕

 

왕세자의 교육은 그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태어난 원자의 정서교육을 위해 보양청을 설치하고 종2품 이상인 3명의 관료를 보양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들은 원자의 서책을 공급하고 관리하는 일뿐만 아니라 원자가 먹을 음식과 의복을 살피는 일까지 담당했습니다.


글을 배울 때쯤인 네 살 정도가 되면 보양청은 강학청으로 바뀝니다. 이 곳에선 소학과 천자문 등의 유교 교육을 하였으며 주로 서책의 내용들을 외우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원자는 보통 여덟 살을 전후해 세자로 책봉되는데 책봉 후엔 성균관에서 본격적으로 제왕교육을 받습니다.


왕세자 교육은 '서연'이라 하며 3명의 관리가 서연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강의는 보통 조강, 주강, 석강으로 하루에 세 번 진행되었는데 무더운 여름에는 조강만 실시하기도 했습니다. 나라에 중요한 제사가 있거나 왕과 왕비의 생일, 일식과 월식, 그리고 사형을 집행할 때에도 수업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 왕의 정신적 지주, 왕세자의 스승

 

▲사진3 비현각 내부 스승들의 자리

 

서연은 3명의 서연관이 담당했습니다. 이들 중 한 명은 왕세자의 교육을, 2명은 복습을 맡았죠. 서연에서의 교육을 '진강'이라고 하는데 세 명의 스승 중 한 명이라도 불참할 경우, 연대책임을 물어 대죄로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당시 대죄는 종신유배나 사약을 내리는 것이었으니 왕세자의 교육을 맡은 책임이 얼마나 무거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서연관의 자격 요건 또한 까다로웠는데요. '경국대전'에 의하면 서연관은 문신이어야 하고, 뇌물을 받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한 자의 자손이 아니어야 했습니다. 선발 과정에서 부모 양측 4대 위의 조상들까지 조사했다고 하네요. 적임자의 경우 다른 관직에서의 임기가 만료되지 않았더라도 선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왕세자의 스승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을까요? 서연관은 왕세자를 가르치는 만큼 많은 혜택을 받기도 했습니다. 중앙 관리의 경우, 매년 두 차례에 걸쳐 근무 성적을 평가해 승진과 면직을 결정하는데 서연관은 이 규정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또한 이들에겐 직급을 뛰어넘어 승진하는 일이 수월했습니다. 실제로 세종을 가르쳤던 이수는 서연관의 자격이 아니었음에도 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정3품 당상관인 승지로 발탁되었습니다. 예종은 파직 당한 스승에게 관직을 주기 위해 특별히 기관을 설치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미래의 왕을 가르쳤던 만큼 그 대우도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 세자의 친구 될 자격

 

▲사진4 또래와 어울리는 왕세자 이미지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에는 공주의 친구인 '예동'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인 연우가 민화공주의 예동자격으로 궐에 들어와 세자와 만나게 되죠. 일반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또래 친구들과 어울렸던 것과 달리 왕실의 자녀들은 인위적으로 붙여준 또래들과만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사대부의 자제나 일반 백성 중 준수한 자를 엄격히 선발해 함께 지내고 공부했죠. 이는 학업에 대한 부담을 줄여주고 대인관계를 넓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훗날 왕위에 올랐을 때 올바른 인재등용을 할 수 있는 안목을 키우도록 한 것입니다.

 

 

◎ "통(通)이오~!" 매일매일 시험 스트레스

 

▲사진5 비현각 내 세자가 공부하던 자리


왕세자도 시험은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수업을 시작할 때마다 이전에 배운 것을 확인했으며 수시로 책을 덮고 전날 배운 것을 외우게 했습니다. 공식적인 시험으로는 '고강'이 있었는데 고강은 과거 응시자들이 보는 구술시험과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정기시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강'이 치러지는 방식은 KBS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에서 일부 재연되기도 했는데요. 감독관이 경서의 글귀를 써넣은 대나무쪽을 통에 넣어 뽑게 합니다. 이렇게 뽑은 글귀를 해석하는 것이죠. 어느 글귀가 나올지 모르니 책 한권을 통째로 외워야 시험을 치를 수 있었습니다. 시험성적은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4등급으로 매겨졌습니다. 통(通)은 우수하게 통과했음을 뜻하고 약(略)은 두 번째, 조(粗)는 세 번째, 불(不)은 낙제였습니다. 시험은 5일에 한 번 실시되었고 성적은 장부에 기록되었죠. 성적은 곧바로 왕에게 보고 되었다니 그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을 듯 합니다.

 

 

◎ 세자의 극기훈련, '심신수련법'

 

심신수련법은 왕세자를 왕의 재목으로 다듬기 위해 반드시 실시했던 절차였습니다. 대표적인 교육과정으로는 인두수련법과 사신수련법, 지식법 등이 있습니다. 인두수련법은 크게 소리내어 책을 읽고 암송하는 것으로 음률에 맞춰 몸을 좌우로 흔들도록 했습니다. 매우 많은 노력이 필요한 수련법으로 인두수련법에 능한 왕자의 경우 경서 한 권을 통째로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암송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사신수련법은 신체를 단련하는 교육법입니다. 사지를 강화하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건식과 습식 피부마찰을 했습니다. 추운 겨울에 눈으로 온몸을 비볐으며 영하의 혹한에도 홑바지저고리만 입고 극기 훈련을 하였습니다. 심지어 야간훈련까지 하며 담력을 키우기도 했습니다.


지식법은 정신집중을 위한 호흡법을 말합니다. 왕세자가 세수할 때 옻칠을 한 함지에 소금물을 타 거행했는데 이 함지에 귀만 막고 머리 전체를 담가 숨을 참는 것입니다. 제대로 하지 않으면 소금물이 콧속으로 들어가 아리거나 쓰라렸죠. 심신수련법의 최종 목적은 시련을 이겨내기 위한 것으로 비밀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사진6 옥좌

 

왕은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 무색하게 왕이 되기 위한 과정은 만만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식과 덕을 쌓으면서 혹독한 방법으로 심신수련까지 해야 했으니 말이죠. 왕위에 오른다는 것은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왕세자 교육은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인재를 키우기 위한 것이었죠. 결국 왕세자 교육은 엄격한 훈련을 통해 왕의 자질을 키우는 과정이었습니다. 교육기관과 내용, 교수 및 학습 방법, 교재까지 미리 정해져 있는 맞춤 교육인 것이죠. 이만큼 혹독한 왕세자 교육이 있었기에 조선 왕조가 500년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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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2004년 한국곤텐츠진흥원의 <조선왕조 아동교육> 프로젝트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 모든 사진은 문화콘텐츠닷컴 <조선왕조 아동교육>에서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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