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코드 벗은 드라마, 세계는 지금 ‘한드’ 시대

상상발전소/방송 영화 2018.08.17 17:30 Posted by 한국콘텐츠진흥원 상상발전소 KOCCA

이미지 출처 : tvN <시그널>

 

 


미국 ABC 방송에서 새로운 기록을 쓰고 있는 드라마 (이미지 출처 : 더 굿닥터)

 

‘X파일’과 ‘프렌즈’. 1990년대 ‘미드(미국 드라마)’ 열풍을 일으킨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국내 대중들은 이 작품들을 보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X파일에선 사회의 불가사의한 음모에 UFO, 외계인까지 박진감 넘치게 다뤄진 걸 보며 감탄했다. 프렌즈는 사랑과 우정 이야기를 굳이 울며불며 할 필요 없이 유쾌하면서도 재밌게 그려낸 것에 끌렸다. 사람들은 한국 드라마에서 채울 수 없던 갈증을 그렇게 해소하기 시작했다. 


미드로 시작된 외국 작품에 대한 관심은 점차 다른나라로 확대됐다. 2000년대 들어선 독특한 색채의 장르물이 발달한 ‘일드(일본 드라마)’ ‘영드(영국 드라마)’ 마니아들이 양산됐다. 이 같은 움직임에 방송사와 제작사들은 확산되는 외국 드라마들을 수입하기 바빴다. 수출은 어려웠다. ‘겨울연가’ 등 일부 한국 작품이 큰 인기를 얻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실패하고 말았다. 외국사람들이 한국 드라마 고유의 정서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8년, 분위기가 크게 달라졌다. 한국은 이제 드라마 주요 수출국으로 부상했다. 나아가 한국 드라마는 한류를 이끄는 대표 콘텐츠가 됐다. 한국 작품의 줄거리와 콘셉트 등 포맷을 그대로 판매해 현지제작하는 방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 2015년까지 한해 1~2건에 불과했던 드라마 포맷 수출은 지난해 이후 15건 정도로 늘었다. 또 완성작에 더빙이나 자막을 입혀 수출하기도 한다. 중국, 동남아에서만 일어나는 현상도 아니다. 국내 대중들을 흔들었던 미국, 일본, 유럽 등 드라마 본토에 본격 침투하고 있다. ‘미드’ ‘일드’처럼 국내에서 다른 나라의 드라마가 하나의 문화 트렌드가 됐듯 이제 해외에서도 ‘한드’ 열풍이 불기 시작한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달라진 걸까. 과거와 달리 한 미국 ABC 방송에서 새로운 기록을 쓰고 있는 드라마 ‘더 굿닥터.’ 국 드라마가 외국 사람들을 사로잡게 된 비결은 뭘까.

 

 



tvN 드라마 ‘기억’의 일본판이 후지TV TWO에서 방영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tvN 기억)

 

최근 한국 드라마는 포맷 수출뿐만 아니라 완성작도다양한 나라에 판매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OCN 터널)

 

이 변화의 중심에 선 작품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우선 미국 ABC 방송에서 새로운 기록을 쓰고 있는 ‘굿닥터’가 있다. 2013년 KBS에서 방영된 이 작품을 리메이크한 미국판 ‘굿닥터’는 시즌1의 큰 인기에 힘입어 원작에도 없던 시즌2를 만들기로 했다. 평균 시청률 1.8%로 최근 3년간 방송된 ABC방송 전체 드라마 시청률 가운데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갑동이’와 ‘미생’도 미국 시장에서 리메이크를 추진하고 있다. 


일본 시장에도 다양한 작품이 진출했다. 2016년 ‘미생’이 후지TV에 제작된 것을 시작으로 ‘시그널’이 KTV, ‘기억’이 후지TV TWO에서 잇따라 방영되고 있다. 이밖에 ‘캐리어를 끄는 여자’ ‘또 오해영’ 등도 선보일 예정이다. 


포맷 수출뿐만 아니라 완성작도 다양한 나라에 판매되고 있다. ‘터널’ ‘보이스’ ‘듀얼’ 등이 모두 글로벌 OTT(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 업체 넷플릭스를 통해 미국, 프랑스, 벨기에 등에 판매됐다.


이 작품들에서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드라마만의 성공 공식처럼 여겨졌던 출생의 비밀이나 불륜 같은 ‘막장’ 코드가 없다는 점이다. 가부장적가치관을 적용한 대가족 중심 작품도 없다. 대신 의학드라마부터 추리극 등 다양한 장르물 드라마가 대거포진해 있다. 


한드 열풍의 성공 비결이 여기에 있다. 출생의 비밀과 불륜, 대가족 드라마는 외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없었다. 누구나 웃을 수 있는 예능 중심의 포맷 수출이 이뤄져 왔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장르물은 국적을 불문하고 즐길 수 있다. 의학 드라마는 전 세계 단골 소재이며, 추리극은 미국과 일본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특화돼 온 분야이기도 하다. 


나아가 한국 장르물만의 장점도 인정받고 있다. 드라마 본토 시장에서도 놀라워할 만큼 신선하면서도 촘촘하게 구성돼 있다. 서장호 CJ E&M 글로벌콘텐츠사업국장은 “한국만의 참신한 소재를 바탕으로 속도감있는 전개, 흡입력 있는 스토리까지 갖췄다는 평가가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한국 드라마의 주요 코드였던 출생의 비밀과 불륜, 대가족 드라마는

외국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반면 의학이나 추리극 등 장르물은 국적을

불문하고 즐길 수 있다. 특히 한국만의 참신한 소재를 바탕으로 한 속도감

있는 전개, 흡입력 있는 스토리가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처럼 장르물이 진화하게 된 이유는 뭘까. 사회적으로는 국내에서 거세게 불고 있는 콘텐츠의 개인화, 파편화 현상과 맞물려 있다. 기존 시청자들의 작품 선택권은 리모콘을 쥔 부모에게 있었다. 가족 드라마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젠 다 같이 모여앉아 가족 드라마를 보는 경우가 흔치 않다. 오히려 어둡고 무겁다는 이유로 안방극장에서 외면당했던 추리물 등 실험적인 작품을 혼자 몰입해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 신인 작가들의 등장으로 장르물은 더 많이 나오고 있다. 기성 작가들은 자신들의 경륜을 담아 가족 드라마에 치중하거나 그들이 만들어놓은 출생의 비밀과 같은 코드를 자주 사용했다. 하지만 미드, 일드 등을 꾸준히 접하며 자라온 신인 작가들은 장르물에 보다 몰두하고 있다. 방송사나 제작사도 콘텐츠의 개인화, 파편화 경향을 감안해 과거와 달리 신인 작가들을 적극발굴하고 있다. ‘비밀의 숲’ ‘터널’ 등 지난해 큰 인기를얻었던 장르물 대부분이 신인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내용뿐만 아니다. 그동안 제작사들이 차곡차곡 쌓아온 성과와 신뢰도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과거 미드, 일드를 수입했던 시절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드라마 포맷을 수출한 현지 제작사들은 한국에서 과연 작품을 다시 어떻게 제작하는지 눈여겨봤다. 많은 나라의 제작사들이 좋은 작품을 수입하고도 현지화에 실패하는 것과 달랐다. 국내 방송계 관계자는 “자신들의 포맷을 구입한 한국 제작사들이 더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 높은 제작 수준을 확인했고 신뢰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한국 드라마를 가져다 리메이크할 때 쉽게 현지화할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까지 마련했다. 드라마를 만들기 위한 기획부터 제작, 편성, 마케팅, 홍보 전략까지 전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포맷 바이블’을 제작것이다. 작품 당 무려 200~500쪽에 달한다. 


그동안 드라마는 예능에 비해 현지화 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 수출이 어려웠다. 특히 우리와 정서가 많이 다른 미국, 유럽은 대사의 사소한 부분까지 고쳐야 해 더 오래 걸렸다. 이를 그들보다 먼저 경험해 봤던 한국 제작사들은 현지화 때문에 속도가 늦어질까봐 포맷 수입을 꺼리던 문제를 적극 해소하고 나섰다. 배우 오디션 진행 과정, 사전 인터뷰 질문지, 카메라 위치, 조명 등 매우 디테일한 요소까지 바이블에 넣어 준다. 원작자로서 해외 제작사에 직접 가 기본 틀을 잡아주는 ‘플라잉 PD(flying PD)’도 있다. 플라잉 PD는 직접 국내 제작진을 인터뷰해 해외 제작사 측에 도움이될 만한 정보들을 담아 전달하기도 한다.

 

 



tvN의 인기 드라마 ‘시그널’은 일본으로 판권이 수출됐다. (이미지 출처 : tvN 시그널)

 

한드의 높아진 위상은 캐스팅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방영되는 ‘시그널’과 ‘기억’엔 유명 스타들이 출연한다. 과거 한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한 작품엔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이 캐스팅됐던 것과 상반된다. 일본판 ‘시그널’에서는 영화 ‘너와 100번째 사랑’ 등으로 큰 인기를 얻은 사카구치 겐타로가 배우 이제훈이 맡았던 프로파일러 형사를 연기한다. 김혜수가 연기했던 차수현 형사 역할은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 ‘라이어 게임’에 출연한 기치세 미치코, 조진웅의 이재한 형사 캐릭터는 드라마 ‘갈릴레오’에서 열연한 기타무라 가즈키가 맡는다. 일본판 ‘기억’에선 배우 이성민이 맡았던 주인공 변호사 역할로 일본 대표 중견배우이자 드라마 ‘47인의 사무라이’ 등에 나왔던 나카이 기이치가 나온다. 


이 파급력은 앞으로 더 막강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먼저 넷플릭스 효과를 기대해 볼 수 있다. ‘터널’ ‘보이스’처럼 완성작을 넷플릭스에 판매하게 되면 한 번에 많은 국가에 소개될 수 있다. 넷플릭스가 진출한 190개국 전부에 작품을 판매할 수도 있고, 장르물 수요가 큰 지역만 골라 집중적으로 선보일 수도 있다. 국가별로 하나씩 계약을 맺고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여러 국가를 설정할 수 있어 최근 국내 드라마 관계자들이 많이 선호하고 있다. 


드라마 본토 효과도 누릴 수 있다. 중국과 동남아 지역에만 수출이 한정돼 있을 때는 다른 나라에 재판매될 확률이 낮았다. 이들 지역의 콘텐츠에 관심을 두는 글로벌 제작사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일본, 유럽 등은 드라마 본토에 해당하는 만큼 많은 제작사들이 눈여겨본다. 심지어 남미, 중동과 같은 지역에서도 콘텐츠를 살핀다. 예를 들어 미국판 ‘굿닥터’를 본 중동의 한 드라마 제작사에서 또 판권을 사갈 수있는 것이다. 세계적인 포맷 컨설팅그룹 더포맷피플의 미셸 로드리그 대표는 “재확산이 가능한 시장으로 가는 게 드라마 등 콘텐츠 수출의 핵심”이라며 “이 시장을 적극 공략해 나간다면 보다 많은 국가에 한국 작품이 퍼져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본문을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

※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일일드라마를 즐겨보는 부모님과 함께 티비 앞에 앉아있다 보면 곧 벌어질 내용을 줄줄 예언하는 초능력을 구경하게 됩니다. 무슨 내용이냐 여쭤보면 백 몇 십 부작이 넘어가는 지난 줄거리도 막힘 없이 요약하시죠. 과연, 오랜 시청으로 일일 연속극의 형식과 패턴을 익히신 분들입니다. 하지만 10분을 못 견디고 방에 들어와 폰을 만지작거리다 모바일 게임을 켭니다. ‘대체 왜 저걸 꼬박꼬박 보시는 거지? 무슨 재미로?’



이미지 출처 – MBC 드라마 <천사의 선택> 홈페이지



그런데 일일드라마와 모바일 게임은 꽤 닮아있습니다. 일일극 속 인물의 동선을 유심히 관찰하면 미니시리즈에 비해 상당히 단순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림이나 조각품 등을 늘어놓은 재벌집 세트 안에서의 직선 이동과 2층과 거실을 연결하는 계단의 상하 이동은 2D 횡스크롤 액션게임의 제한된 캐릭터 이동 범위를 떠올리게 합니다. 또한 게임에도 만질 수 있는 아이템과 건드려도 반응이 없는 배경이 있듯이, 각 장소에서의 약속된 행동 외에는 공간과 분리되어 있는 인물들은 정해진 소품 말고는 상호작용을 하는 일이 드뭅니다. 서민 대가족이 한 집에 사는 홈 드라마를 볼까요? 게임에서 맵의 이곳 저곳 돌아다니며 NPC를 터치해 대화하고 미션을 얻거나 전투를 하듯이, 홈 드라마 세트의 방과 식구들 역시 같은 역할을 합니다. 홈 드라마의 보스몹은 주로 안방에 기거하죠.





영화 같은 게임, 게임을 닮은 영화들이 있지만 이들이 각 매체가 지닌 몰입감을 다른 매체로 옮겨오려는 시도를 한다면, 일일극과 모바일 게임은 집중력과 관심이 분산되기 쉬운 시청환경과 플레이환경의 한계에 대응하는 방식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콘솔게임이나 PC게임 히트작을 모바일 게임으로 이식할 때, 규모가 축소되고 플레이어의 자유도가 제한되는 대신, 난이도가 낮아지고 조작이 간편해지며, 한 턴을 플레이할 때 소모되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도 모바일 환경과 사용자에 맞춘 변화인데요.



이미지 출처 - 한게임 <피쉬아일랜드>


초기 세팅으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도록 스킨만 교체해서 계속 이벤트를 만들어내고, 일일 미션 등으로 매일 접속을 유도하고, 짧은 구간을 반복해서 플레이하고 그에 대한 보상 역시 짧은 주기로 반복되는 모바일 게임을 접해본 분들이라면 미니시리즈와 일일극의 차이도 이해하기 쉬울 거라 생각됩니다. 일일극은 복수나 신분 찾기, 혈연이 중시되는 세계관 안에서 한 회 20분 남짓의 시간동안 매일 비슷한 갈등이나 문제를 던집니다. 


대화를 엿듣고, 물건을 뒤지고, 모욕하고, 뻔한 거짓말을 하는 전개가 반복되죠. 이는 극 바깥의 시청자에게 등장인물에 대한 윤리적 심판관 역할을 유도하게 됩니다. 자잘한 악행을 벌이는 인물의 품성을 평가하는 행위가 짧은 주기의 보상이 되는 셈입니다. 일일드라마와 모바일 게임의 구조와 형식이 유사해도 모바일 게임에 쉽게 중독되는 내가, 일일극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도 규칙과 보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장년층의 관심사에 맞게 규칙과 보상이 설계된 일일극의 세계에 재미를 느끼고 거듭 참여할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 거죠.




이미지 출처 – 모바일게임 <몬스터최종병기> 공식카페


이미지 출처 – 모바일게임 <AOS레전드> 블로그



작은 화면의 한계를 넘기 위해 판타지나 고전의 세계관을 옮긴 ‘장대한 스토리’ 등으로 홍보하던 모바일 롤플레잉 게임의 유행은 화려한 격투신을 자랑하는 방향으로 변화했습니다. 게임 개발도구인 ‘게임 진’의 기술발전이 모바일게임의 퀄리티를 상향시킨 점을 우선 꼽아야겠지만, 이 장르에 상당한 관심이 있지 않은 사람이 여러 게임의 스크린 샷을 봐서는 얼추 다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스토리 역시 몇 가지 패턴 안에 있고, 유저는 대강의 전개를 예측할 수 있죠. 모바일 게임 소개 페이지는 지루해진 사용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 터치스크린의 반응을 살린 타격감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 KBS2 드라마 <엄마도 예쁘다> 실내세트장



이러한 변화는 일일극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정해진 공간에서 익숙한 갈등을 반복하는 드라마들의 실내세트 신이 꽤나 역동적이란 점도 최근의 경향입니다. 이전까지는 대화로 긴장을 끌어가던 일일 드라마와 주말극의 거실에서 머리채를 잡고 뒹구는 육탄전이 빈번하고, 아침 드라마는 사위를 ‘김치’로 후려칩니다. 주방에서는 며느리의 얼굴에 스파게티를 던지기도 했죠. SNS등을 통해서 이미지 캡처나 동영상 편집본으로 보신 있이 있으실 텐데요. 어떤 갈등을 표현하거나 해결할 때의 선택지도 한정되어있고 경우의 수가 적다 보니, 말초적인 자극에 치중하는 모욕들이 반복되면서 자극의 역치는 높아지고 급기야 일일드라마가 난투극과 타격감으로 오르내리는 지경까지 왔죠.



영상 출처 : 유튜브 < MBC 드라마 모두다 김치> 중에서




이미지 출처 – tvN 드라마 <비밀의 숲> 홈페이지



드라마 한 회동안 주인공의 동선을 그려보면 집, 자동차, 카페, 사무실을 돌다가 고층빌딩 옥상이나 공원, 한강에 갑니다. 일상생활에서 반복되는 동선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잘 만든 드라마들은 패턴에서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올해 방영한 tvN <비밀의 숲>이 좋은 예가 될 텐데요. 최초 살인사건이 발생한 단독주택의 실내 동선에서 시작해 단독주택 주변으로 그리고 주택이 위치한 용산구 동선으로 물리적인 실감을 주면서 차례차례 확장하는 <비밀의 숲> 초반부는 사건발생-새로운 증거-또 다른 연루자로 이어지는 극의 전개와 공간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공간과 동선을 예로 들었지만 다른 요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라마든 게임이든, 장르의 양식화된 패턴이 무엇이었는지. 어떤 한계나 필요에 따라 그 양식이 채택되어 왔는지. 그 장르를 누가 즐기고 어떤 기대를 충족시키는지 살피면 패턴을 벗어나는 시도를 하는 작품을 골라내고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기게 되죠. 드라마를 좀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입니다.



※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씬 스틸러(Scene Stealer)라는 말을 아시나요?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 연기력이나 개성으로 주연보다 주목받는 조연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대표적인 씬 스틸러로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다크 나이트>(2006)의 악역 조커가 있습니다. 조커는 故 히스 레저의 광기에 가까운 연기력으로 주목받은 것은 물론, "법과 규제를 뛰어넘은 선을 행사할 권리가 있다면, 또한 법을 뛰어넘는 악을 행사할 권리도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 캐릭터이기도 했습니다. 더 이전의 작품에서 찾아보면 <레옹>(1994)의 스탠 필드(게리 올드만 역), <싸이코>(1960)의 노먼 베이츠(안소니 퍼킨스 역) 등이 있습니다.

 


▲ 사진1 <다크나이트>의 악역 조커



앞서 말한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영상 속에서 악역으로 등장했다는 것인데요. 우리는 주인공을 기억하는 것 이상으로 악역을 기억합니다. 우리나라의 콘텐츠에서도 씬 스틸러로 기억되는 악역들이 있습니다. 특히 올해 콘텐츠들은 악역 열전이라 할 정도로 인상적인 악역이 많았습니다. 오늘은 영상, 만화, 텍스트 등 다양한 우리나라의 콘텐츠 속 악역들을 소개합니다.

 



▲ 사진2 영화 <군도:민란의 시대>의 캐릭터 포스터



가장 먼저 소개할 악역은 올해 사극 블록버스터 중 하나로 주목받았던 <군도: 민란의 시대>의 조윤(강동원 역)입니다. 이 영화는 철종 13년 궁핍한 시절, 탐관오리의 횡포에 맞선 의적떼 군도와 그 수장 도치(하정우 역)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입니다. 그 대적점에 있는 것이 조선 최고의 무관 조윤입니다. 그는 극악한 방법으로 양민들을 수탈하면서 그의 세력을 키워나갑니다. 



▲ 사진3 <군도>의 악역 조윤(강동원 역)



영화의 주인공이 의적떼인 군도와 도치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조윤의 영화'라는 영화평이 주를 이루었는데요. 이는 조윤이 악역으로 거듭날 수밖에 없는 배경에 대한 설명이 영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생의 아들로 태어나 의붓어머니에게 언제나 천대받던 인물이라는 설정은 관객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습니다. 또한 배우 강동원의 뛰어난 용모가 영화 <군도>를 '조윤의 영화'라는 별명을 얻게 하는데 한 몫 했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이 영화는 무게중심을 잃은 영화라는 혹평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조윤이라는 인물이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란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사진4 영화 <끝까지 간다>의 포스터


 

<군도>의 조윤이 영화가 끝마칠 때까지 차마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었다면, <끝까지 간다>의 박창민(조진웅 역)은 그와 반대로 영화의 끝 장면까지 한시도 긴장을 놓지 않게 하는 극악무도한 악역입니다.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고건수(이선균 역)는 영화의 주인공으로써는 너무나 모자란 면이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장례식 날 경찰서로 가다 실수로 뺑소니 사고를 내어 사람을 죽이고, 이를 모면하기 위해 어머니의 관 속에 시체를 숨깁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조차 착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고건수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것은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박창민이 고건수의 악행을 뛰어넘을 정도의 절대 악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건수의 뺑소니 사고를 비롯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며 여러 방법으로 그를 협박합니다.

 


▲ 사진5 영화 <끝까지 간다>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 박창민(조진웅 역)



나쁜 녀석, 그리고 더 나쁜 녀석의 이러한 만남은 영화 전체에 끊을 수 없는 긴장감을 선사하는데요. <끝까지 간다>의 긴장감은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의 관객들에게 통하였습니다.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 초청되는 한편 해외 30여 개국에 배급 판권을 판매하였습니다.

 


 

▲ 사진6 드라마 <왔다! 장보리>의 포스터



2014년 하반기에 인기몰이한 드라마 중에서는 <왔다! 장보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시청률 35% 이상을 기록한 이 드라마는 사실 흔히 말하는 '막장 드라마'에 속합니다. 이 드라마 속에는 기억상실, 계모, 악녀 등의 키워드가 모두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와 합쳐지고 시청자의 공감을 얻어내면서, 종영 후에 <왔다! 장보리>는 '명품 막장 드라마'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 사진7 <왔다! 장보리>의 악역 연민정(이유리 역)



이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주인공 장보리(오연서 역)를 사사건건 방해하는 악녀, 연민정(이유리 역)입니다. 그녀가 <왔다! 장보리>의 제목이기도 한 주인공 장보리보다도 깊이 기억되면서 이 드라마는 <왔다! 연민정>이란 별칭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모면하기 위해 자신을 고아로 소개하고 인화(김혜옥 역)의 양녀가 되는 연민정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거짓과 악행을 반복합니다. 그녀는 동거한 남자친구의 아이를 버리거나 인화의 친딸인 장보리가 친모와 만나지 못하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등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의 악행들을 매화마다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마지막 회에서는 연민정의 첫사랑 문지상(성혁)이 우연히 만나는 유치원 선생님 민소희가 연민정의 외모에 점을 찍고 나타나는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이는 <왔다! 장보리>의 작가 김순옥 분이 <아내의 유혹>의 작가이기도 하여 이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내의 유혹> 역시 희대의 악녀로 기억되는 신애리(김서형 분)가 등장했다는 것을 기억해 보면, 악역은 시청자들을 울고 웃게 하는 순기능도 있는 듯합니다.


 

 

▲ 사진8 웹툰 <노블레스>의 단행본 표지

 


이번에는 웹툰 속 악역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2007년부터 시작되어 네이버 대표 웹툰으로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웹툰 <노블레스>는 인간을 위해 싸우는 뱀파이어라는 컨셉의 소년만화입니다. 소년만화답게 각 에피소드마다 인간을 위협하는 악역이 등장합니다. 이중 가장 초반에 나온 악역이 M-21입니다. M-21 또한 사연이 있는 악역으로 등장합니다. 여학생을 인질로 잡아 협박하는 그에게는 기억을 삭제당하고 생체실험을 당했으며, 동료인 M-24의 약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상부에서 시키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던 사연이 있었습니다. 결국, M-21은 에피소드의 마지막 부분에서 학생들을 돕고 인간의 편으로 돌아서는 선택을 합니다.

 


▲ 사진9 웹툰 <노블레스>의 단행본 표지

위 세 명의 캐릭터는 모두 악역으로 등장하였다가 인간 편으로 돌아섰다.



M-21뿐만이 아니라 이후 <노블레스>의 악역 중에는 악의 편에 서 있으나 인간을 해치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던 악역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에피소드가 끝날 때에는 자기희생을 하거나 주인공의 편에 서게 됩니다. 이런 역할로 자신의 생명 유지를 위해서는 적군에 설 수밖에 없던 M-24, 여동생을 찾기 위해 무엇이든 불사하던 타카오 등이 있습니다.


 


▲ 사진10 모바일게임 <쿠키런 for Kakao>



이번에는 게임 속 악역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의 보급 등으로 최근 게임에서는 모바일 게임이 단연 대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요즈음의 모바일게임은 화면 너머의 다른 사용자와 상대하는 방식의 RPG 게임이 많다 보니 특정한 악역을 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용자끼리의 경쟁 속에서도 게임의 스토리텔링을 위해 악역이 상정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쿠키런 for Kakao>의 마녀입니다. 

 


▲ 사진11 학습만화로 출시된 <쿠키런>

 


<쿠키런>은 쿠키 캐릭터가 달리면서 젤리를 획득, 점수를 얻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꼭 악역이 필요한 게임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녀의 오븐에서 먹히지 않기 위해 탈출한 쿠키들'이라는 설정이 추가되면서 각각의 쿠키에 개성이 부여되고, 사용자들은 게임의 스토리에 대해 관심을 끌게 됩니다. 한편 <쿠키런>을 출시한 데브시스터즈는 이러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쿠키런의 주 타겟인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습만화를 출시하였습니다. 즉, <쿠키런>의 악역 마녀는 게임 속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쿠키런>이라는 세계관을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영화, 드라마, 만화, 게임 등 다양한 콘텐츠에 나타난 악역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한 <쿠키런>의 악역 마녀를 제외하면 최근 악역 캐릭터에는 몇 가지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악행을 할 수밖에 없는 사연을 가지고 있어 차마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고, 또 하나는 현실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극악무도하여 미워할 수밖에 없는 악역입니다. 이러한 악역의 유형에는 사람은 실수든 고의든 악행을 할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현재 우리는 콘텐츠 속 악역을 보며 울고 웃습니다. 주인공보다 영향력 있는 악역들이, 2015년에는 또 어떻게 콘텐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낼지 기대해 봅니다.

 


ⓒ 사진 출처

- 사진1 워너브라더스 코리아(주)

- 사진2~5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 사진6,7 MBC

- 사진8, 9 재미주의

- 사진10 데브시스터즈

- 사진11 서울문화사




 




※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