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을 한 번 둘러보세요. 바닥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 부분에 장판을 자로 접어 올리거나 바닥재와 비슷한 색으로 두른 몰딩이 보일 텐데요. 이 부분을 걸레받이라고 합니다. 물걸레로 바닥을 닦다가 젖은 걸레가 벽지에 닿아서 때가 타지 않도록 보호하는 용도로, 한국의 주택은 대개 걸레받이 시공이 되어있습니다. 침대나 소파, 식탁을 쓰지 않던 시절에는 모든 생활이 방바닥에서 이루어졌고, 하루에도 수차례 방을 쓸고 닦아야 했던 생활습관이 주택에 남은 거죠. 가사노동의 부담을 대부분 여성이 지다보니 허리를 굽히고 방걸레질을 하는 모습은 오랫동안 전업주부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경향신문을 거쳐 중앙일보에서 연재된 정운경의 시사만화 <왈순 아지매>는 주로 남성이 주인공인 신문 만평들 속에서 흔치 않게 여성을 전면에 세운 사례인데요. 60년대에 시작되어 2002년 연재종료 무렵까지 방걸레질을 하는 컷은 꾸준하게 반복됩니다. 정치문화사회에 관심이 많은 왈순 아지매는 집회에 나가 피켓을 들거나 당국에 전화로 항의하는 능동적인 시민 캐릭터였지만, 동시에 걸레질은 여성의 일이라는 편견 안쪽에 있기도 합니다. 성실한 보통 주부의 특징을 포착해서 압축하고 간략화한 표현이 한편으론 가사노동을 여성의 일로 한정하는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만들어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스테레오타입들은 대중문화의 창작자와 수용자가 속한 시대의 관습을 반영하고, 또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폐기되거나 수정되어왔는데요. 드라마 속에서 걸레질 장면이 어떻게 다루어졌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왈순 아지매 - 이미지 출처 : 1972. 04. 01. 경향신문 7면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는 다양한 가사노동과 각각의 절차를 꼼꼼하게 짚어 왔습니다. 1991년 방영당시 최고 시청률 64%를 기록한 MBC <사랑이 뭐길래>는 가풍과 생활양식이 다른 두 집이 사돈을 맺으면서 교류하고 서로 영향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욕실이 없는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연탄을 때는 구옥에서 살림을 하는 여순자(김혜자) 2층짜리 단독주택에서 최신 가전제품을 쓰는 한심애(윤여정). 30년 만에 재회한 여고 동창인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신경전을 벌이고, 서로 성격이 이상해졌다고 빈정거리기도 하죠. 얼핏 보기엔 순자는 고생하고 심애가 호강하고 산 탓에 둘의 대화가 자꾸 어긋나는가 싶지만, 드라마는 누가 낫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한 양의 가사노동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여기에 더해 <사랑이 뭐길래>는 주부들이 겪는 감정노동을 예리하게 짚어냅니다. 식구들을 억압하는 구두쇠 남편의 비위를 맞추던 순자가 폭발하고불평불만을 늘어놓다가도 시어른들 기척이 있으면 금세 웃는 낯으로 바꾸며 살아온 심애가 무너지듯 주저앉는 순간은 단지 육체적으로 힘이 들어서가 아닙니다순자네 살림은 파출부가 돕고 심애네는 식구들이 가사노동을 분담하지만누군가를 돌보는 일에 따르는 긴장은 순자와 심애가 다 떠안고 있죠두 사람의 성격이 변한 이유를 찾는다면 30년 세월 동안 반복된 감정노동이 원인일겁니다특히 꼬인 심사를 감추지 못하고 말로 내뱉고야 마는 순자의 성격은 방걸레질을 하는 모습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요. 국가와 민족을 들먹이며 일장연설을 하는 남편 앞에서 부산스럽게 방을 닦거나쥐고 있던 걸레를 패대기치며 이죽거리는 김혜자의 연기는 방걸레질 장면 하나에도 오래 묵은 스트레스를 담아냅니다.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 이미지 출처 : 사랑이 뭐길래 24, 25회 화면 캡처





당시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장면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보일 때도 있습니다. 92년 방영된 <아들과 딸>은 남아선호사상으로 인한 가족갈등을 그린 드라마였습니다. 이란성 쌍둥이인 귀남(최수종)만 애지중지하는 어머니에게 모진 구박을 당하던 후남(김희애)은 가출해서 서울로 향합니다. 온갖 고생을 하던 후남은 출판사에서 일하며 야간대학을 졸업하고 작가로 등단해 자전적 소설을 펴냅니다. 온화한 성품의 검사 석호(한석규)와 결혼해 자그마한 아파트에 신혼살림도 꾸리게 되죠. 사회적으로도 성취하고 개인적인 행복도 누리게 된 후남은 신문을 보는 석호 곁에 방걸레를 쥐고 다가앉아 (바람 잘 날 없는 친정식구들과 달리) 자기만 편하게 지내게 된 것 같아 민망하다고 말을 붙입니다. 석호는 다정한 목소리로 후남을 격려하죠. “후남씨가 뭐가 편해요. 선생님 하랴, 작가 하랴, 주부 하랴, 며느리 하랴, 아내 하랴, 딸 하랴 얼마나 바빠요.”

후남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석호는 유약한 귀남과 비교되며 이상적인 남편으로 인기가 높았는데요석호의 말대로 다방면으로 바쁜’ 아내와 이를 잘 알고 있는 남편의 관계는 맞벌이하는 현대적인 젊은 부부의 상에 가까운 반면두 사람의 대화는 방걸레를 든 아내와 신문을 읽는 남편이라는 전형적인 구도로 재현됩니다70년대를 배경으로 삼았던 점을 고려해야겠지만지금 보면 아침에 아내와 함께 출근하는 석호가 가사 일은 나누지 않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자신을 배려하는 좋은 남자와 결혼했어도 가사노동은 후남의 몫이라는 것아이러니일까요리얼리티였을까요?



MBC 드라마 아들과 딸 - 이미지 출처 : 아들과 딸 63회 화면 캡처





시대가 바뀌고또 달라진 생활상을 반영하는 드라마들은 일상의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남자들의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합니다남들처럼 평범하게 매일 반복해서 가사노동을 하는 남자가 미디어에 워낙 드물게 등장하다 보니 오히려 그 평범함에 방점이 찍히기도 하는데요. 2013년 방영된 SBS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주인공 오은수(이지아)의 친정아버지인 병식(한진희)이 걸레질 하는 장면이 그렇습니다아내가 시장에 간 사이걸레로 안방 구석구석을 훔치는 모습은 극 전개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그저 일상 삽화일 뿐인데요바로 그 때문에 갖는 힘이 있습니다어쩌다가 한 번 생색을 내려고 하는 걸레질이 아니라 쭉 그렇게 살아왔구나 싶은 거죠김수현 작가가 극중 가장 상식적인 인물이며점잖은 중년 남성인 병식에게 방 걸레를 쥐어 준 까닭도 남자의 가사노동을 당연하고 평범한 일상에 포함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아침마다 아내 순자에게 세숫물 수발을 들게 하던 병호(이순재)가 마당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 쌀을 씻기까지 55(최종회)가 걸렸던 것과 비교해 봐도 재미있습니다.



SBS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 - 이미지 출처 : 세 번 결혼하는 여자 15, 32회 화면 캡처





JTBC 드라마 밀회 - 이미지 출처 : 밀회 6회 화면 캡처



앞서 <아들과 딸>에서 걸레질 하던 후남이 이야기를 드렸는데요. 2014년 방영된 JTBC <밀회>에는 김희애를 위해 걸레질을 하는 남자가 있습니다. 장판의 터진 부분을 테이프로 기워놓은 누추한 방이지만 좋아하는 사람을 깨끗한 자리에 앉히려고 방걸레질을 하는 선재(유아인)의 뒷모습은 혜원(김희애)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타인과의 관계를 거래로 맺고 자신까지 도구로 삼았던 혜원은 혈연도, 고용관계도 아닌 누군가 호의-부담을 느끼고 보상을 치러야 하는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준 마음에 어떻게 응해야하는지 몰랐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해 입지가 없는 선재에게 자신 역시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한 일들은 대부분 재단의 힘이나 거래로 쌓아올린 특권을 이용한 것들이었죠.
그 친구는 그저 정신없이 걸레질을 했을 뿐입니다.” 재벌가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비리에 연루되었던 혜원. 그녀가 자신의 잘못들을 받아들이는 법정 최후 변론에서 난생 처음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순간이었다며 선재의 걸레질 장면을 복기하는 까닭은, 아마도 같은 종류의 헌신으로 밖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겁니다.
 
27년 전 드라마부터 최근작까지, 드라마 속의 걸레질 하는 장면 몇 가지를 살펴보았는데요. 꼭 걸레질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어떤 장면이 고정된 성 역할을 답습하거나 이를 반전하며 희화화 하지는 않는지. 지금 널리 통용되는 표현이 앞으로는 어떻게 바뀔지 생각하며 드라마를 보면 과거에는 문제가 없다고 여겨졌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은 표현들,  진보하거나 도리어 퇴행한 사례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영화나 만화, 광고로 확장할 수도 있죠. 대중문화는 우리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반영하고, 또 우리는 대중문화를 통해 편견이 굳어지기도 하는데요. 이를 더 낫게 만드는 방법 역시 상호작용에 있지 않을까 합니다. 따져 묻고, 평가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길 바라는 이유입니다.




※ 본 글의 내용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